1849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물여덟 살의 청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형 집행장에 섰다. 혁명 서클에 가담한 죄였다. 눈가리개가 씌워지고, 총구가 겨눠졌다. 그리고 —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차르의 감형 명령이 도착한 것이다. 그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4년간의 유형 생활. 살인자와 강도 사이에서 잠을 잤고, 영하 40도의 동토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그에게 허락된 책은 단 한 권,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이 건네준 요한복음뿐이었다. 이 한 권의 책이 한 시대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를 빚어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더 이상 이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던 무신론과 유물론을 정면으로 마주하되, 철학 논문이 아닌 소설로 응답했다. 그의 마지막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응답의 정점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문장은 소설 속 둘째 형제 이반 카라마조프의 논리적 결론이다. 이반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세계를 거부한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이 있는 세계를, 그런 세계를 허락한 하나님의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드린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반의 반항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숨어 있다. 그가 하나님을 고발하려면 도덕적 질서가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고통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절대적 기준이 필요하다. 이반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것이 이반의 비극이다. 하나님을 지운 순간, 그가 의지했던 도덕의 토대도 함께 사라진다. 성경은 이 역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시편 14:1
스메르댜코프 — 논리의 끝
이반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그의 이복동생 스메르댜코프가 증명한다. 스메르댜코프는 이반의 “모든 것이 허용된다”를 글자 그대로 실행에 옮겨 아버지를 살해한다. 이반은 경악한다. 하지만 스메르댜코프의 논리는 정확했다. “형이 가르쳐준 대로 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20세기가 실제로 겪은 실험이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하나님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 한 전체주의 체제들은 스메르댜코프가 한 일을 국가 규모로 실행했다. 하나님 없는 도덕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역사가 피로 기록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이 보여주는 선행과 양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로마서 2:14-15
무신론자의 양심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다. 창조주가 인간 본성에 새겨놓은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아 있는 감각은 도덕의 유지를 설명할 뿐, 도덕의 토대가 되지는 못한다. 하나님 없는 우주에서 “해야 한다”는 명령은 존재할 근거가 없다.
대심문관의 키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 이야기다. 16세기 세비야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그들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대신 짐을 져주었다. 네가 돌아와서 다 망칠 셈이냐.”
대심문관의 논리는 이렇다 — 인간은 약하고, 자유는 짐이며, 권위와 기적과 빵이 필요하다. 종교가 하나님을 빌미로 인간을 통제하는 모든 체제의 본질을 꿰뚫는 진단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의 긴 연설에 한마디도 답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다가가 입술에 키스한다. 대심문관은 떨면서 문을 열어준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논증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닿는다. 완벽한 논리 앞에서 한 번의 키스가 — 사랑의 직접적 현현이 — 성벽을 무너뜨렸다.
시베리아의 요한복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회심도 그러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신학 논증이 아니었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읽은 요한복음, 그리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다고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남겠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의 근원이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인격 안에 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없이는 참된 자유도 없다.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요한복음 8:32, 36
대심문관은 자유가 인간에게 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는 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자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사랑의 근원에 뿌리박은 자유다.
오늘, 우리에게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에 진단한 병은 21세기에 더 깊어졌다. 하나님 없이도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는 번영했지만, 동시에 의미를 잃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회의 진단서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방탕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선언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답을 찾았다. 시베리아의 동토에서, 논증이 아닌 한 인격 —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그리스도 — 안에서. 이반의 반항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 대심문관의 논리가 무너진 곳에, 침묵하시는 그리스도의 키스가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에, 자유는 짐이 아니라 선물이다. 한 러시아 작가가 평생을 걸어 증명한 이 진실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