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없어도 도덕적으로 살 수 있잖아요. 종교가 왜 필요한데요?”
이 질문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경험적 근거가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이 있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추악한 위선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기거나, 질문자를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질문이 실제로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정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 무신론자의 주장을 공정하게 듣자
무신론적 도덕론의 핵심 주장은 대략 이렇다.
- 도덕은 사회적 계약과 진화적 본능의 산물이다
- 공감 능력, 호혜성, 협력 본능은 종교 없이도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
- 세속 휴머니즘은 종교적 권위 없이도 인권, 평등, 자유라는 도덕 체계를 세울 수 있다
이 주장에는 참인 관찰이 섞여 있다. 기독교 신학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관찰에서 도출하는 결론이다.
2.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과 “도덕의 근거가 있다”는 것은 다르다
이 질문의 핵심적인 혼동은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과 도덕적 기준의 근거를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
무신론자가 이웃을 돕고,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처음부터 인정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로마서 2:14-15
바울의 논점은 명확하다. 무신론자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종교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도덕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의 양심 자체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증거다.
이것은 역설적 상황을 만든다. 무신론자가 “신 없이도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의지하는 그 도덕 감각 자체가 신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3. 도덕의 “바닥”은 어디인가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도덕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가?
진화론적 도덕론은 “협력하는 개체가 생존에 유리했으므로, 도덕 감정이 자연선택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 감정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뿐, 도덕이 왜 구속력을 가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도덕이 순전히 생존 전략의 부산물이라면:
- 생존에 불리한 도덕은 폐기해도 된다
-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 “~해야 한다(ought)“는 “~이다(is)“에서 도출될 수 없다 (흄의 법칙)
사회적 계약론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박탈하기로 합의하면, 그것은 도덕적인가?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은 정확히 그렇게 작동했다.
4.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은 무신론자가 반드시 비도덕적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논점은 이것이다. 초월적 도덕 입법자가 없다면, 도덕적 의무의 궁극적 근거가 사라진다.
C. S. 루이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 우리가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분노할 때, 우리는 이미 공정함의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있다. 그 기준이 순전히 인간의 발명품이라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5. 기독교가 말하는 “종교의 필요”
“종교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의 대답은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당신은 도덕의 문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 죄책감의 해결, 죽음 너머의 희망, 그리고 창조주와의 화해의 문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23-24
무신론적 도덕론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나는 내 자신의 도덕 기준조차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다. 이 실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세속 휴머니즘은 “더 노력하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은혜가 있다”고 말한다.
6. 양심의 증거, 그 너머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종교가 없어도 도덕적으로 살 수 있잖아요.”
그렇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예측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는 도덕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 당신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그 “해야 한다”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 당신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어떻게 하는가?
- 죽음 앞에서 당신의 도덕적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무신론적 도덕론은 침묵하거나 순환논증에 빠진다. 반면 기독교는 분명한 대답을 제시한다. 도덕법이 있는 것은 도덕법의 입법자가 계시기 때문이며, 당신이 그 법을 어겼을 때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마태복음 22:37-40
종교는 도덕의 도구가 아니다.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도덕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당신의 양심이 이미 희미하게 가리키고 있던 바로 그 방향에 있다.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