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식민지 선교라는 이름의 문화 말살. 마녀사냥.
이 단어들 앞에서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대응은 변명이다. “그때는 시대가 달랐으니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런 말은 진실 앞에서 눈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니 출발점을 분명히 하자. 기독교 역사에는 폭력이 있었다. 그것도 산발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이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선포했을 때, 예루살렘으로 향한 군대는 도중에 유대인 마을을 학살했다. 종교재판소는 고문을 합법적 수단으로 승인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 아래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파괴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사실이 증명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의사의 범죄가 의학을 폐기하는가
한 외과의사가 수술대 위에서 환자를 죽였다. 의도적으로. 이 범죄는 끔찍하며, 그 의사는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이 외과학 자체가 거짓이라는 증거가 되는가? 수술이라는 행위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가?
누구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행위자의 범죄와 그가 표방한 체계의 진리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 구별이 갑자기 사라진다. 십자군이 사람을 죽였으니 기독교는 거짓이다. 종교재판이 사람을 불태웠으니 하나님은 없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유전의 오류(genetic fallacy) — 어떤 주장의 기원이나 역사적 사용을 근거로 그 주장 자체의 진위를 판단하는 오류다.
기독교의 진리 여부는 기독교를 표방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기독교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칼을 명하셨는가
예수가 체포되던 밤, 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 예수의 반응을 보라.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마태복음 26:52
그리고 이 말은 더 넓은 가르침의 일부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명시적 가르침이다. 십자군 기사가 예루살렘에서 학살했을 때, 그는 이 명령에 복종하고 있었는가? 대답은 명백하다. 아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요한복음 18:36
그리스도의 왕국은 군사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이후, 제국이 교회를 삼켰다. 교회는 국가 권력의 도구가 되었고, 칼은 기도서 옆에 놓였다. 십자군은 이 결탁의 산물이지, 복음의 산물이 아니다.
기독교는 스스로를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 역사의 폭력을 비판하는 근거 —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이다” — 이 근거는 어디에서 왔는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는 스스로의 역사를 심판할 내적 기준을 갖고 있다. 복음 자체가 교회의 폭력을 정죄하는 기준이 된다. 종교개혁 자체가 그 증거다. 교회 외부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자기 비판이 일어났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9
기독교는 인간의 죄를 놀라운 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바로 이것이다 — 인간은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기독교인이 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독교를 반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처음부터 선언한 것 — 인간은 타락했으며 구원이 필요하다 — 을 확증한다.
역사의 다른 쪽 — 말하지 않는 것들
기독교 역사에서 폭력만을 보는 것은 한쪽 눈을 감는 것이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는 복음의 확신에 근거하여 20년 넘게 의회에서 싸워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칼을 들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했다. 그분은 폭력으로 죽으셨지, 폭력을 행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권력의 포기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그렇다면 일관되게 물어야 한다
만약 기독교가 역사적 폭력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면, 같은 기준은 모든 세계관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20세기 무신론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체제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조직적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무신론 자체를 거짓으로 만드는가?
물론 아니다. 무신론의 진위는 무신론자들의 행동이 아니라 무신론의 논증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정확히 같은 논리가 기독교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빙자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심판하신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가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 시편 50:16-20
질문을 바꿔야 한다. “기독교인이 폭력을 저질렀으니 기독교는 거짓인가?”가 아니라, “폭력을 저지른 자들의 스승은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 가르침을 읽어보라. 그리고 제자들이 스승을 배반했을 때, 스승을 탓할 것인지, 제자들을 탓할 것인지 판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