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시다 — 그런데 왜 ‘예수’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신성의 감각이 그분을 가리키고, 피조 세계가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증거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 하나님이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에서 아기로 태어나셨다고 고백한다. 무한자가 유한 속으로 들어오셨다. 만물을 지으신 분이 피조물의 살과 피를 입으셨다.
왜?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남을 뿐 필연적인 진리가 되지 못한다.
율법이라는 거울 — 완전한 파산 선고
성육신이 왜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은밀한 전제가 숨어 있다. ‘착함’의 기준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전제다. 하나님은 “조금 더 나은 당신”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한 의다.
율법은 그 완전한 기준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기준 앞에 설 때,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거울이 된다. 우리의 참된 모습을 비추는 거울.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로마서 3:20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정확히 진단한다. 율법은 구원하지 않는다. 율법은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것은 부분적 부족이 아니라 총체적 파산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다. 단 한 발짝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로마서 8:3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율법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이행해야 할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법이 아니라 우리다.
빚은 무한하고, 갚을 자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파산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11세기 신학자 안셀무스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이 문제를 날카로운 논리로 정리했다. 하나님께 범한 죄의 빚은 무한하다. 피해를 입은 분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00원을 훔치더라도 그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죄의 무게가 달라지듯, 무한히 거룩하신 분을 거스른 죄는 유한한 인간이 갚을 수 없는 무한한 빚이 된다.
동시에, 그 빚을 갚아야 할 의무는 인간에게 있다. 천사가 대신할 수 없다. 죄를 범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가능한 방정식이 성립한다. 무한한 가치의 속죄를 치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고, 인간의 자리에서 율법 아래 그 짐을 져야 할 분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존재는 온 우주에 단 하나 —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신 분뿐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어야 한다. 그분의 임무는 사람을 하나님께 연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 강요 II.12.1
성육신은 감상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인간의 파산이 총체적이기에, 구원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그리고 그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는 것.
내려오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요한은 “거하시매”라는 표현에 구약의 깊은 울림을 담았다. 원어 ἐσκήνωσεν(에스케노센)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광야의 성막 —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던 그 장막이, 이제 한 사람의 몸이 되었다. 구약의 성막이 그리스도를 향한 예표였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방향이다. 위를 향한 인간의 모든 시도가 실패한 자리에,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6–8
바울이 그리는 이 하강의 궤적은 숨이 막힌다. 하나님의 본체 → 자기를 비움 → 종의 형체 → 사람과 같이 됨 → 자기를 낮춤 → 죽기까지 복종 → 십자가. 한 계단씩 내려오시는 그 발걸음의 끝이 구유이고, 구유의 끝이 십자가다.
살과 피를 입으신 이유 —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
성육신에는 속죄의 필연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 히브리서 2:17–18
대제사장은 백성 가운데서 취해진 자여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는 분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 — 배고픔, 피로, 슬픔, 눈물, 유혹, 그리고 죽음까지. 죄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히브리서 4:15
성육신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의 구체성을 이렇게 증언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요한일서 1:1
들었다. 보았다. 만졌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바로 이 구체성 때문에, 성육신은 마음을 움직인다. 추상적 원리는 감탄을 자아내지만, 나를 위해 살과 피를 입으신 분은 사랑을 깨닫게 한다.
베들레헴에서 멈추지 않는 질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의 빚은 무한하고 갚을 자는 인간이어야 하기에,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만이 그 자리에 설 수 있다. 성육신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가? 구유에 누우신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베들레헴의 구유는 시작일 뿐이다.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몸은 이미 수의를 예고하고 있었고, 말구유의 나무 결은 이미 십자가의 나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육신이 필연이었듯, 그 육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도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의 끝에 서 있는 것이 십자가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