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명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교리 앞에서 한 가지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처녀 생식(parthenogenesis)은 불가능하다. 포유류에서 단성생식은 실험적 조건에서도 극히 제한적으로만 관찰되며, 자연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난자가 정자 없이 완전한 인간 개체로 발생하는 일은 — 생물학이 알고 있는 한 — 일어나지 않는다.
이 판단은 과학적으로 정확하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이 판단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놀랍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동정녀 탄생은 처녀 생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범주 자체가 다른 주장이 놓여 있으며,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반박도 믿음도 모두 엉뚱한 곳을 겨냥하게 된다.
범주 오류라는 진짜 문제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동정녀 탄생은 거짓이다.” 이 문장에는 은밀한 전제가 숨어 있다. 자연계의 인과 체계가 유일한 인과 체계라는 전제다. 생물학이 기술하는 메커니즘 — 정자와 난자의 수정, 감수분열, 배아 발생 — 외에는 어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선택이다. 과학은 자연 안의 규칙적 패턴을 기술하는 학문이다. “자연 밖에는 아무 원인도 없다”는 명제는 과학이 증명한 결론이 아니라,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존재론적 자연주의로 확대한 철학적 신앙고백이다.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은 처녀 생식의 생물학적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인과 체계 바깥에서, 자연의 창조주가 자연 안으로 개입한 사건을 고백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누가복음 1:35
여기서 “덮으시리니”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스키아조(ἐπισκιάζω)‘는 생물학 용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덮는 장면(출 40:35), 변화산에서 구름이 제자들을 덮는 장면(눅 9:34)에 사용된 창조와 임재의 언어다. 누가는 생식 메커니즘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직접적 행위를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동정녀 탄생은 거짓”이라는 논증은 범주 오류(category error)다. 생물학은 자연 안의 생식 과정을 기술한다. 동정녀 탄생은 자연의 창조주가 자연 안에서 행한 초자연적 행위를 고백한다. 둘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닫힌 우주인가, 열린 우주인가
여기서 정직한 질문이 하나 더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초자연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하지 않나?”
맞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쟁점이다.
“동정녀 탄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생물학의 관할이 아니다. 그것은 **“이 우주가 닫힌 체계인가, 아니면 자연 너머에 자연을 만든 원인이 존재하는 열린 체계인가”**라는 형이상학의 관할이다. 자연주의자가 “초자연적 원인은 없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실험실에서 도출한 결론이 아니라 세계관의 선택이다. 마찬가지로 유신론자가 “창조주가 계시다”고 고백할 때, 그것 역시 세계관의 선택이다.
다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가 무전제의 중립적 입장인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나는 증거만 따른다”는 말 뒤에, “증거란 자연적 증거만을 의미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입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2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아들, 삼위의 제이위께서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한 본체이시고 동등하신 분이시다. 때가 충만하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니, 그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유적 연약함을 취하셨으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그녀의 실체로 잉태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 이것이 핵심이다. 동정녀 탄생의 원인은 생식 메커니즘의 변형이 아니라 성령의 창조적 역사다.
그런데 — 왜 하필 동정녀여야 했는가
범주 오류를 짚고, 형이상학적 전제를 검토한 후에도,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성육신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시는 방식이어야 했는가?
마태복음은 예수의 잉태를 기록하면서, 700년 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태복음 1:22-23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야 7:14
동정녀 탄생은 임의로 선택된 기적이 아니라, 오랜 예언의 성취로서 기록된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성경은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다고 가르친다. 인류를 구속할 분은, 인류의 본성을 온전히 취하시되 죄 없이 오셔야 한다. 동정녀 탄생은 성령의 특별한 성화 사역을 통해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방식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성화하시는 능력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것을 “마지막 아담”이라는 개념으로 선포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고린도전서 15:45
첫 아담은 흙에서 왔고, 마지막 아담은 성령으로 왔다. 동정녀 탄생은 이 “새로운 기원”의 출발점이다.
1세기의 증인들이 몰랐던 것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을 몰랐던 고대인들의 순진한 이야기”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다(골 4:14).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잉태 소식을 듣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마 1:19). 요셉은 처녀가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마태복음 1:19
더 중요한 것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고백은 초기 유대 공동체 안에서 결코 유리한 주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생아 의혹은 예수의 사역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요 8:41). 동정녀 탄생을 “지어낸” 것이라면, 이보다 더 불리한 이야기를 지어낸 셈이 된다.
벨직 신앙고백 18조는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되고 온전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음을 고백한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인간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는 보통 사람이 태어나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진정한 지적 용기는 어디에 있는가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는 것이 지적 용기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글에서 확인한 것은 이것이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거부가 과학적 관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범주 오류다 — 기독교는 처녀 생식을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거부가 “자연적 원인만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이다 — 다만 스스로를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신앙이다.
진정한 지적 용기는, 자신의 전제를 검토하는 데 있다. “나는 왜 초자연적 원인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는가? 그 확신의 근거는 실험인가, 아니면 세계관인가?” 이 질문을 정직하게 묻는 순간, 동정녀 탄생이라는 고백은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만약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 정말로 계시다면 — 무에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불러내신 분이 계시다면 — 그분이 한 여인의 몸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