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은혜의 자리를 율법이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십일조, 은혜의 자리를 율법이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십일조#헌금#율법주의#개혁주의#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들어가며 — 어느 성도의 고백

“목사님이 말씀하셨어요. 십일조를 안 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저는 헌금을 드릴 때마다 기쁨 대신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한 평범한 한국 교회 성도의 고백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결코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십일조는 오랫동안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로, 때로는 “축복의 조건”으로, 심지어 “구원의 증거”로까지 가르쳐져 왔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인가?


제1부: 문제 — 율법의 멍에가 은혜의 식탁을 뒤엎고 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세 가지 병폐

첫째, 십일조의 율법적 강요이다. 많은 교회에서 십일조는 선택이 아닌 의무로 가르쳐진다. 말라기 3장 10절은 문맥과 언약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경고가 성도의 양심 위에 무거운 짐으로 얹어진다.

둘째, 헌금의 공개와 감시이다. 헌금 봉투에 이름과 금액을 기재하게 하고, 그 내역을 교회 임직원이 확인하는 관행은 성도의 내밀한 신앙 행위를 공적 감시 아래에 놓는 것이다.

셋째, 물질 축복과의 교환 논리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번영 신학적 설교는 복음을 하나의 거래로 전락시킨다.

이 세 가지 병폐의 뿌리는 하나로 귀결된다. 구약의 십일조 규정을 신약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해석학적 오류, 그리고 그 오류 위에 세워진 율법주의이다.


제2부: 진단 — 구약 십일조는 신약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가

1. 율법의 삼중 구분과 십일조의 위치

개혁주의 신학은 구약 율법을 도덕법(lex moralis), 의식법(lex ceremonialis), **시민법(lex civilis)**으로 구분한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도덕법(십계명)은 영구적 효력을 지니지만,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문자적 구속력이 폐지되었다고 가르쳤다.

구약의 십일조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스라엘 십일조의 전부를 내가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게 하였은즉” — 민수기 18:21

십일조는 이스라엘 신정국가 안에서 레위적 제사장 제도를 떠받치는 의식법적·시민법적 규정이었다.

2.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져온 결정적 변화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가장 명료하게 논증한다.

“제사장의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못하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한 말이라” — 히브리서 7:12-13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레위적 제사장 제도 전체가 종료되었고, 그 제도를 유지하던 십일조 규정 역시 효력을 상실했다.

“전에 있던 명령이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히브리서 7:18-19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선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은 양심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이시며,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말씀 밖에 있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의무로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제3부: 처방 —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드리라고 말하는가

원리 1: 마음에 정한 대로, 자발적으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린도후서 9:7

“마음에 정한 대로” — 헌금의 분량은 외부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지 말지니” — 어떤 형태의 강요도 이 원리에 위배된다. “즐겨 내는 자”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드리는 마음의 기쁨이다.

원리 2: 은혜에 감격한 마음에서 넘쳐흐르는 응답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고린도후서 8:1-5

마케도니아 교회의 비밀은 —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께 맡긴 사람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넘침이 된다.

원리 3: 복음의 자유를 지키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라디아서 5:1

헌금의 구체적 비율은 **중간적 사항(adiaphora)**에 속한다. 10퍼센트를 드리든, 5퍼센트를 드리든, 30퍼센트를 드리든, 그것은 각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정할 일이다. 이것을 교회가 일률적으로 정하여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나가며 — 은혜가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낳는다

은혜는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낳는다. 율법은 기껏해야 10퍼센트를 강요할 수 있지만, 은혜에 감격한 마음은 자기 자신까지 드린다. 율법은 두려움으로 지갑을 열게 하지만, 은혜는 기쁨으로 삶 전체를 열게 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십일조를 의무나 축복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둘째,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선포해야 한다. 은혜를 맛본 성도는 강요 없이도 넘치게 드린다.

셋째, 헌금을 성도 개인의 양심과 하나님 사이의 내밀한 문제로 존중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사역을 신뢰해야 한다. 참된 관대함은 성령께서 마음 안에 일으키시는 열매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린도후서 9:7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즐겨 내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다.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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