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답한 적 없는 질문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의 영혼은 어디서 왔는가?
아마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막연히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 “주셨다”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당신이 잉태되는 그 순간 한 영혼을 직접 창조하여 작은 배아 안에 부여하신 것인가? 아니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영혼이 전달된 것인가?
이 질문은 사변 같다. 그러나 답이 어디로 기우느냐에 따라 — 원죄가 어떻게 전가되는가, 그리스도가 어떻게 죄 없이 인간이 되셨는가, 수정란은 언제부터 인격인가 — 이 거대한 교리들의 모양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교회는 2천 년 동안 이 질문에 결정적인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못함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두 입장 — 영혼유전설과 영혼창조설
역사적으로 두 큰 흐름이 있었다.
영혼유전설(traducianismus, 라틴어 tradux = “가지에서 뻗은 가지”)은 영혼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된다고 본다. 출산은 단지 몸의 생산이 아니라 전인의 생산이며, 부모의 영혼에서 나온 영혼이 새로 잉태된 몸과 함께 한 인격을 이룬다. 북아프리카의 터툴리안이 이 입장을 정식화했고, 종교개혁기에는 마르틴 루터와 다수의 루터파 정통이 이를 따랐다.
영혼창조설(creatianismus)은 매 사람마다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창조하여 잉태된 몸에 부여하신다고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체계화했고, 로마 가톨릭 정통이 이를 공식 입장으로 삼았으며(교황 비오 12세, 「Humani Generis」), 칼뱅·튀르쟁·찰스 핫지를 비롯한 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가 이 편에 섰다.
흥미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결정을 미루었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에서 그는 영혼유전설이 원죄 전가를 더 자연스럽게 설명한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영혼의 영적·비물질적 본성을 보호하는 데는 창조설이 낫다고 보았다. 이 동요는 그가 정직했다는 증거다.
성경은 어느 쪽인가 — 양쪽 모두에 단서가 있다
본문 데이터를 정직하게 마주하면, 두 입장 모두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창조설을 시사하는 본문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창세기 2:7
흙은 부모로부터 올 수 있는 것이지만, 생기(nishmat chayyim)는 하나님이 직접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이 패턴이 아담에게만 한정된다고 볼 본문상의 이유는 없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전도서 12:7
영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단지 일반 섭리가 아니라 영혼의 직접적 부여를 가리킨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 스가랴 12:1
여기서 “지으신(yotser)“은 토기장이가 빚는 행동을 가리키는 분사 — 곧 현재 진행되는 창조 행동이다. 모든 사람의 영혼에 대해 하나님이 지금도 친히 빚으신다는 함의가 있다.
영혼유전설을 시사하는 본문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 창세기 5:3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5장에서 셋은 “아담의 모양”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영혼을 포함한 전인의 출산을 시사한다고 읽을 여지가 있다.
9 또한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일조를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 히브리서 7:9-10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은, 후손이 단지 가능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조상 안에 실재했음을 함의한다. 영혼유전설의 직관과 통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시편 51:5
이 본문은 잉태 그 자체가 이미 죄의 통로 안에서 일어남을 가리킨다 — 죄가 영혼에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잉태와 동시에 시작된다는 함의다.
성경은 어느 한쪽으로 결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쪽을 취하든, 다른 쪽을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원죄 전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 진짜 무게중심
이 논쟁의 진짜 무게중심은 원죄가 어떻게 후손에게 전가되는가에 있다. 두 입장은 이 문제에 다르게 답한다.
영혼유전설은 답이 단순하다. 부모의 죄성이 영혼과 함께 자녀에게 자연적으로 전달되므로, 모든 후손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원죄의 부패(corruption) 측면이 깔끔하게 설명된다.
영혼창조설은 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한다. 만일 하나님이 매번 깨끗한 영혼을 창조하신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죄책을 지게 되는가? 하나님이 깨끗한 영혼에 죄를 부과하시는가?
이 난제에 대한 개혁주의의 답은 법적 전가(imputatio)다. 17세기 이후 두 가지 변형이 발전했다.
| 입장 | 대표자 | 메커니즘 |
|---|---|---|
| 직접 전가(immediate imputation) | 프랜시스 튀르쟁, 찰스 핫지 | 아담은 언약의 머리이며, 그의 죄책이 후손에게 법적으로 직접 전가된다. 부패는 그 전가의 결과로 따라온다. |
| 간접 전가(mediate imputation) | 조슈아 플라케, 뉴잉글랜드 신학 | 부패가 먼저 자연적으로 전달되고, 그 부패 위에 죄책이 부과된다. |
대다수 개혁주의 정통은 직접 전가를 지지한다. 이유는 로마서 5장의 핵심이 두 머리(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이기 때문이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로마서 5:18-19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법적으로·외래적으로(forensic, alien) 전가되듯이, 아담의 죄책도 법적으로 전가된다. 그렇지 않으면 칭의의 외래적 성격까지 무너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 직접 전가는 영혼의 기원에 대한 어느 입장과도 양립한다. 그러므로 원죄 교리는 영혼유전설을 강제하지 않는다. 창조설을 견지하면서도, 아담의 언약적 머리됨을 통한 죄책의 법적 전가와 그에 따르는 전인적 부패를 동시에 고백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무죄 인성 — 두 입장의 시험대
이 논쟁이 사변에 머물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론이다. 그리스도가 죄 없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어느 입장으로 더 잘 보호되는가?
영혼유전설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의 영혼도 마리아로부터 자동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리아도 죄인이다. 마리아 자신이 누가복음 1:46-47에서 고백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누가복음 1:46-47
“내 구주”라는 말은 마리아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혼이 어떻게 죄와 단절되는가? 영혼유전설 진영은 성령의 거룩한 잉태로 사슬이 끊어졌다고 답한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누가복음 1:35
이 답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이 부모로부터 자동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순간 영혼유전설의 일관성은 약해진다.
영혼창조설은 더 단순하다.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므로, 그리스도의 영혼 역시 직접 창조되어 죄로부터 자유롭게 인성에 연합된다. 죄가 인성에 부과되는 길은 언약적 머리됨(아담)을 통해서인데,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아닌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그 언약적 부과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양쪽 모두 핵심은 동일하다 — 그리스도는 아담의 언약적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머리로 오셨다.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으나 죄의 사슬에서는 단절되셨다. 어느 입장이든 이 신비를 보존할 수 있다.
바빙크의 종합 — 신비를 신비로 인정하기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교의학」 II권에서 두 입장을 길게 검토한 뒤, 약간의 차이로 영혼유전설 쪽으로 기울었다. 이유는 인간이 영혼과 몸의 기계적 결합이 아니라 유기적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출산은 단지 몸의 생산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하는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라 기질·성향·죄성을 포함한 전인적 유산이다. 영혼만 깨끗하고 몸만 부패했다는 식의 반쪽 인간 도식은 결국 그리스 이원론의 잔재일 수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동시에 분명히 말했다 — 이것은 신앙고백의 조항이 아니다. 어느 입장을 취해도 정통이며, 어느 입장도 다른 핵심 교리(원죄·기독론·구원론)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보완 장치를 갖추고 있다. 신비를 신비로 인정하는 것이 신학자의 겸손이다.
낙태 윤리에서 — 두 입장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자리
흥미로운 것은, 이 논쟁이 낙태라는 현대의 가장 첨예한 윤리 문제 앞에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영혼창조설은 말한다 — “잉태의 순간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여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수정란은 이미 영혼을 가진 한 인격이다.
영혼유전설은 말한다 — “잉태의 순간 부모로부터 영혼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수정란은 이미 영혼을 가진 한 인격이다.
두 입장 모두 수정의 순간이 인격의 시작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점에서 영혼의 기원 논쟁은 낙태 반대의 신학적 근거를 약화시키지 않고 강화한다. 시편 139편과 예레미야 1:5는 모태 안의 존재를 이미 인격으로 다룬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 시편 139:13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 예레미야 1:5
영혼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한 답은 두 갈래로 갈리지만, 언제 시작되는가에 대한 답은 하나다 — 잉태의 순간부터다.
신명기 29:29 — 신학자가 침묵해야 할 자리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답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결정적 답이 없는 영역에서 어떻게 신학할 것인가라는 태도의 문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명기 29:29
영혼이 어디서 오는지는 감추어진 일에 가깝다. 우리는 성경의 단서들과 신학적 정합성을 비교하여 한쪽으로 기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쪽을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신학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가 분명하고 어디부터가 신비인지를 정직하게 구별하는 데 있다. 영혼의 기원은 신비의 자리에 가깝고, 그 신비를 인정한 채로도 우리는 더 분명한 자리들을 굳게 붙들 수 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 그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누구의 손에서 왔는지는 분명하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빚어진 한 그릇이며, 잉태의 순간부터 한 인격이며, 그 인격은 아담 안에서 죄에 매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분명하다면, 그 사이에 놓인 메커니즘의 미궁은 신학자의 손에서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