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래도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았다.”
이 문장은 한국인의 양심 선언문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이웃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어떤 책이 갑자기 당신을 “죄인”이라 부른다. 불쾌하다. 억울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건가?”
이 반응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바로 이 자연스러움이 문제의 핵심이다.
기준이 잘못되었다
죄(sin)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범죄, 도덕적 실패, 수치스러운 행위를 떠올린다. 한국어에서 “죄”는 법정의 언어이거나 수치의 언어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라는 문장은 “나는 범죄자다” 또는 “나는 수치스러운 사람이다”로 번역된다. 여기서 이미 오해가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 이전에 상태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누구 앞에 서 있느냐의 문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여기서 기준은 “이웃보다 나은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는가”**다. 우리는 늘 옆사람과 자신을 비교한다.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나?” 하지만 성경의 법정에서 비교 대상은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시험장에서 옆자리 학생의 답안지와 내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채점 기준은 교수가 정한다.
예수님은 그 기준을 이렇게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마태복음 22:37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는가? 아니면 오늘의 일정, 타인의 시선, 해결해야 할 문제였는가? 매 순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준이라면, 단 하루도 그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무가 썩었다
그렇다면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내일부터 더 열심히, 더 바르게, 더 선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여기서 성경의 진단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문제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 자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 로마서 5:19a
성경은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을 때, 그가 개인 자격으로만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였다. 국가 원수가 조약에 서명하면 국민 전체가 그 조약에 묶이듯, 아담의 불순종은 그의 후손 전체에게 미쳤다. 이것이 교회가 “원죄”라 부르는 교리다.
원죄란 “아담이 사과를 먹은 죄가 나에게 전가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인류의 본성 자체가 부패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나무가 썩었기 때문에 썩은 열매가 달리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로마서 3:10-12
“하나도 없다.” 바울은 세 번이나 반복한다. 이것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마음 — 이 타락한 본성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선한 행위라는 이름의 착각
“그래도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고, 선한 행동을 하지 않나?”
맞다. 타락한 인간도 이웃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즉각 붕괴되지 않도록 보존하시는 은혜(일반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기다. 하나님의 율법은 행위의 외형만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마태복음 5:22a
예수님은 살인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셨다. 마음속 분노까지 심판의 대상이다. 간음하지 않아도 음란한 생각이 이미 간음이다. 율법은 행동의 표면이 아니라 마음의 법정을 연다. 이 법정 앞에서 “나는 착하게 살았다”는 자기변호는 힘을 잃는다.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은 탐심이고, 체면을 지키려는 노력은 거짓의 다른 이름이며, 안정과 풍요에 대한 집착은 우상숭배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그 자부심 자체가, 비교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이웃으로 낮춘 교만이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증거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진단이 등장한다. 죄는 기만한다. 자기 죄를 모르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가 너무 깊어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로마서 7:18
죄는 본성 안에 거주하면서 이성을 포획한다. 자기 정당화 논리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확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죄의 기만 작용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마비되어 자기 병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같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마태복음 9:12
“나는 건강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 —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선언 — 가 가장 위험한 죄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진단을 거부하는 행위이며, 스스로 치료의 문을 잠그는 것이다.
진단이 끝이 아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겁다. 기준은 도달 불가능하고, 본성은 부패했으며, 노력은 무익하고, 자기 인식조차 왜곡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의 진단이다.
그러나 의사가 진단서를 내미는 이유는 환자를 절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치료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한다. 죄값이 가벼웠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 대가의 무게가 우리 죄의 무게를 말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은혜의 크기를 증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고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진단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자기 병을 인식하기도 전에 — 먼저 오셨다.
구원은 의지력의 교정이 아니다. 썩은 나무를 다듬는 것이 아니라, 새 나무를 심는 것이다. 새 본성, 새 마음, 새 감정 — 성경은 이것을 “새 창조”라 부른다. 그리고 이 새 창조의 첫 걸음은, 역설적이게도, “나는 죄인이다”라는 고백이다.
그 고백은 수치의 언어가 아니다. 병원 문을 여는 손이다.
“죄인인 채로 오라. 그리스도가 고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