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폭력적인가

구약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폭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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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멈추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온 세상을 물로 덮어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시는 장면. 소돔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퍼부으시는 장면.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한밤중에 죽는 장면. 시편 기자가 원수의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라고 기도하는 장면.

이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구약의 하나님은 왜 이렇게 폭력적인가?

이 질문은 정직한 질문이다.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질문 안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다 — 심판은 폭력과 같다는 전제다. 이 전제가 맞는지, 성경 본문 앞에서 천천히 살펴보자.


심판은 폭력인가

폭력과 심판은 겉으로 비슷해 보인다. 둘 다 고통을 수반하고, 둘 다 파괴적이며, 둘 다 누군가의 힘이 행사된다. 그러나 본질은 정반대다.

폭력은 불의한 힘의 행사다. 자격 없는 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 목적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다. 반면 심판은 정의로운 권위의 실행이다. 판사가 범죄자에게 형을 선고할 때, 우리는 그것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그런 권위가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 시편 11:7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도덕 법칙을 제정하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 자체가 도덕 법칙의 근원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선택한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분이 죄와 영원히 공존하는 것 —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구약의 심판을 ‘폭력’이라 부르는 것은, 수술실의 메스를 흉기라 부르는 것과 같다. 도구의 모양은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과 권위가 전혀 다르다.


홍수 — 120년을 기다리신 하나님

노아의 홍수는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심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폭력 서사로 읽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홍수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창세기 6:5-6

“항상 악할 뿐임을.” 이것은 가끔 실수하는 정도가 아니다.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즉각적 파괴가 아니었다. 근심이었다. 히브리어 ‘아차브’(עָצַב)는 깊은 슬픔, 고통을 의미한다. 심판자가 심판 전에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120년을 기다리셨다(창 6:3).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것은 거대한 설교였다. 내륙에서 배를 짓는 사람 — 그 자체가 임박한 심판의 경고이자 회개의 초대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베드로전서 3:20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폭력은 참지 않는다. 폭력은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120년을 참으셨고, 구원의 문(방주)을 먼저 여셨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탈출구가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이 폭력인가?


소돔 — 심판 한가운데서 손을 잡으시는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구약에서 가장 극적인 심판 장면 중 하나다.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진다. 그런데 이 심판 직전에,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대화 중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흥정한다.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살려주시겠습니까? 45명은요? 40명은? 30? 20? 10명은?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 창세기 18:3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도시 전체를 살리겠다고 하셨다. 문제는 열 명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심판 한가운데서 한 가지 일을 하신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 창세기 19:16

“손을 잡아 인도하여.” 심판의 불이 임하기 직전,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물쭈물하는 롯의 가족 손을 직접 잡아 끌어냈다. 심판을 집행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 동시에 구원받을 자를 직접 손 잡아 끌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폭군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바로의 완악 — 하나님이 죄를 만드시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진 이야기는 다른 종류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출 9:12)면, 바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것은 공정한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본문을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출애굽기를 주의 깊게 읽으면 명확한 패턴이 드러난다.

먼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 — 출애굽기 8:15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 출애굽기 8:32

바로가 먼저, 반복적으로,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경직시켰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완악함을 확정하셨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형벌적 경화’(judicial hardening)라 부른다 — 하나님이 죄를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죄의 방향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원리를 로마서에서 더 넓게 적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 로마서 1:24

“내버려 두사”(파레도켄, παρέδωκεν). 이 단어가 핵심이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그리고 죄에 빠진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신다 —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이것은 조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신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 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 로마서 9:18

이 구절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보여준 반응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로마서 11:33

이것은 사고의 포기가 아니라, 사고의 끝에서 만나는 경외다.


저주시 — 복수를 맡기는 기도

시편의 저주시(imprecatory psalms)는 아마 현대 독자가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본문일 것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시편 137:8-9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숨이 멎는다.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것이 복이라니?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기도다. 시편 기자는 직접 복수를 실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조국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고 아이들이 학살당한 현실 속에서, 그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 복수의 선언이 아니라,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행위다.

바울은 이 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로마서 12:19

둘째, 저주시가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악이 처벌받지 않는 세계, 학살자가 아무 대가 없이 번영하는 세계, 억울한 피해자의 호소가 어디에도 닿지 않는 세계 — 그것이 더 도덕적인 세계인가? 저주시는 세계에 궁극적 정의가 있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이 정의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영원히 아무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바뀌셨는가

여기까지 읽은 독자 중 일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구약에서는 그랬다 치자. 하지만 신약의 예수님은 다르지 않은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고,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셨지 않은가?”

이 생각은 2세기에 이미 등장했다.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왜 이단인가? 예수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의 예수도 심판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마태복음 16:27

하나님은 바뀌지 않으셨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 말라기 3:6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가 점진적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갈라디아서 3:24

구약의 심판은 ‘초등교사’다. 가르치는 내용은 동일하다 — 죄의 심각성, 하나님의 거룩함, 인간의 무능. 다만 가르치는 방식이 그 시대에 맞게 구체적이고 물리적이었을 뿐이다. 홍수는 영원한 심판의 그림자였고, 소돔의 불은 최후 심판의 예표였다. 그림자가 실체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아니다. 그림자가 먼저 보였을 뿐이다.


모든 심판이 수렴하는 한 지점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구약의 모든 심판 — 홍수의 물, 소돔의 불, 이집트의 재앙, 율법의 사형 규정 — 이 모든 것이 향하고 있는 한 지점이 있다. 성경 전체의 서사는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곳은 골고다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5:2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구약 전체에서 죄에 대해 쏟아지던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 위에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홍수로 전 세계를 덮은 것보다, 소돔에 불을 내린 것보다, 이집트에 재앙을 보낸 것보다 — 십자가가 더 무겁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진노를 쏟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논리적 결론이 나온다.

구약의 심판을 ‘폭력적’이라 혐오하면서, 동시에 십자가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는 구약의 모든 심판이 수렴된 지점이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죄에 대한 심판이 폭력이라면, 십자가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만약 십자가가 사랑이라면 — 그것은 구약의 심판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의 표현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개의 속성이 아니다. 이것은 동일한 거룩함의 두 표현이다. 사랑하는 것이 있는 자만이 진노할 수 있다. 의(義)를 사랑하시기에 불의에 진노하시고, 피조물을 사랑하시기에 피조물을 파괴하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남은 질문

“그래도 방식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 질문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면, 한 가지만 더 묻자. 당신이 생각하는 ‘적절한 심판’은 어떤 모습인가? 조용히, 아무 고통 없이, 눈에 보이지 않게 죄가 처리되는 것? 그런 심판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의 심판이 충격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과도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실수 정도로, 약간의 도덕적 결함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죄는 우주적 반란이다.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전면적 거부다. 홍수의 물과 소돔의 불은, 그 반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교육이다.

그리고 그 교육의 최종 목적지는 한 가지다 — 당신에게 방주의 문을 가리키는 것, 소돔에서 당신의 손을 잡아 끌어내는 것, 십자가 아래로 당신을 데려오는 것.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적이지 않으시다. 그분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거룩하신 그분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 — 이것이 구약과 신약이 함께 외치는, 성경 전체의 한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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