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십자가는 왜 그렇게 번쩍거리나

교회의 십자가는 왜 그렇게 번쩍거리나

#교회론#한국 교회#십자가#예배#우상숭배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이 아니다. 붉은 네온 십자가다. 서울의 어느 언덕에서든 고개를 들면 수백 개의 십자가가 경쟁하듯 반짝인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그것은 독특한 야경이고, 불신자에게 그것은 종교적 과시의 풍경이다. 그런데 그 빛 아래를 걷는 성도에게 묻고 싶다. 저 십자가가 비추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는 본래 거리끼는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십자가는 아름다운 상징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 방식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오늘날 전기의자나 교수대를 말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은 이것을 숨기지 않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고린도전서 1:18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고린도전서 1:22-24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지, 십자가의 모양이 능력이 아니다. 네온으로 십자가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 어쩌면 — 거리끼는 것을 거리끼지 않게 포장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복음의 역설적 능력을 세상의 미학으로 번역하려는 시도. 그런데 그 번역에서 원문이 사라진다.

수치의 도구가 권력의 상징이 되기까지

한국 교회의 네온 십자가에는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 직후, 교회 지붕의 십자가는 일종의 선교적 표지판이었다. 군인들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이정표. 거기까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십자가의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유교적 체면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쟁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면서, 십자가의 크기는 교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건물이 커지고, 십자가가 밝아질수록 “하나님이 축복하신 교회”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이 변질의 핵심에는 의미의 전환이 있다. 수치와 자기 비움의 도구였던 십자가가,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나무 형틀은 제도적 자아의 광고판이 되었다. 여기서 바울의 고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20

십자가는 자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런데 번쩍이는 십자가는 제도적 자아의 극대화를 선언한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다.

질그릇의 신학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속적 영광이 외형의 확장이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기 비움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6-8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이런 방식으로 영광을 드러내셨다면, 그의 몸인 교회가 정반대 방향으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바울은 이 원리를 놀라운 비유로 설명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 바울은 복음의 용기(容器)가 질그릇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배의 광채가 질그릇의 초라함을 뚫고 나올 때, 사람들은 그 능력이 그릇에 있지 않고 보배에 있음을 안다. 그런데 교회가 금 그릇이 되려 할 때, 사람들의 눈은 보배가 아니라 그릇에 머문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의 모습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이사야 53:2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분을 따르는 공동체가, 외형의 화려함으로 세상의 시선을 끌려 한다면 — 그것은 누구를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짓는 가장 흔한 정당화는 이것이다. “사람들을 끌어와야 복음을 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러라.” — 요한복음 12:32-33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다. 세상적 방법으로 끌어온 사람은 세상적 것으로만 붙잡을 수 있다. 더 큰 건물, 더 밝은 조명, 더 화려한 프로그램. 끝없는 에스컬레이션. 이것이 19세기 일부 영국 제도권 교회가 걸었던 길이다. 건물은 커졌고, 복음은 작아졌다. 오늘날 유럽의 웅장한 대성당들이 관광지로 전락한 현실이 그 결과를 말해 준다.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그는 세상의 지혜로 무장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고린도전서 2:3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죄인가?

여기서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름다움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성막을 짓는 예술적 재능을 성령으로 부어 주셨다.

내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였노라.” — 출애굽기 31:2-5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 아름다움은 창조 질서의 일부이며, 하나님을 향할 때 거룩하다.

문제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방향이다. 건물은 도구다. 도구가 목적을 압도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 복음의 내용과 모순되는 외형, 공동체의 정체성을 건물로 정의하는 태도, 섬김의 자원을 외형에 소진하는 구조 — 이 세 가지가 경계선이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경고가 울린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 예레미야 7:4

건물이 곧 교회라는 거짓 신뢰.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전통은 교회의 참된 표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합당한 집행, 그리고 권징의 바른 시행. 건물의 크기도, 십자가의 밝기도 교회의 표지가 아니다.

진짜 빛나야 할 것

교회가 빛나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온이 아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태복음 5:14-16

빛나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삶이다. 변화된 삶들의 공동체, 회개하는 눈물, 서로 짐을 지는 사랑 —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이다. 번쩍이는 십자가에 들어가는 전기세로 헐벗은 이웃에게 옷을 입힐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빛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 58:6-7

십자가를 네온으로 빛나게 하기 전에, 먼저 그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이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때, 교회는 어떤 네온보다 밝은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스가랴 4:6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은 건물의 외형이 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이다. 교회의 참된 성전은 벽돌과 네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의 공동체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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