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가도 믿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교회 안 가도 믿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교회론#예배#공동체#은혜의 방편#신앙생활

솔직히 말하면, 이 질문은 꽤 합리적으로 들린다.

일요일 아침,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유튜브를 켠다. 좋은 설교가 넘쳐난다. 감동도 받고, 눈물도 난다. 헌금은 온라인으로 하면 되고, 찬양은 스포티파이로 듣는다. 평일에는 기도하고, 성경도 읽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굳이 일어나서 옷 입고 교회까지 가야 하는 이유가 뭔가?

이 글은 당신을 정죄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당신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한 가지를 정면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그 전제는 이것이다: “믿음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다.”

정말 그런가?


잘린 손가락은 따뜻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매우 구체적인 비유를 선택했다. 건물이 아니다. 조직이 아니다. 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고린도전서 12:27

손가락 하나를 몸에서 잘라 보라. 그 손가락에 아무리 정교한 신경과 근육이 있어도,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 혈액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 자체의 품질 문제가 아니다. 연결의 문제다.

“나는 혼자서도 믿음이 있다”는 말은, 잘린 손가락이 “나는 아직 손가락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바울은 이 그림을 더 밀어붙인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에베소서 4:16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성장은 개인의 내면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체와 연결될 때, 도움을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유튜브 설교는 훌륭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통행이다. 당신이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없고, 당신이 교만해졌을 때 조용히 경고해 줄 수 없다.


교회는 선택지가 아니라 형식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교회를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곳”으로 느끼는 이유는, 교회를 서비스 제공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설교라는 콘텐츠, 찬양이라는 음악, 교제라는 네트워킹. 이 서비스들이 온라인으로 대체 가능하면, 오프라인 매장은 필요 없다 — 이것이 은연중의 논리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서비스 제공자로 묘사한 적이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은혜를 전달하시기로 정하신 통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에베소서 4:11-12

목사와 교사는 유튜브 채널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세워졌다. 말씀의 선포,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서로를 향한 돌봄과 권면 — 이것들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성만찬을 혼자 집에서 빵 떼어 먹으며 할 수 있는가? 세례를 유튜브 라이브로 받을 수 있는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 점을 신앙고백으로 못 박았다. 벨직 신앙고백 28조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 참된 교회에 합류하고, 그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교회의 훈련에 복종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 이 거룩한 모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는 것이다.” — 벨직 신앙고백 28조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는 것.’ 이것은 목사의 의견이 아니다. 교회가 2천 년간 고백해 온 신앙의 내용이다.


진짜 문제를 직면하자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1세기에 이 현상을 목격했다. 교회 출석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썼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히려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5

그런데 바로 앞 절을 함께 읽어야 맥락이 보인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히브리서 10:24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은 출석 체크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서로 돌아보기 위해 모이라는 것이다. ‘돌아보다’의 헬라어 원어(카타노에오)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는 뜻이다. 옆 사람의 영혼 상태를 살피라는 것이다. 이것을 화면 너머로 할 수 있는가?

솔직해지자. 교회에 안 가는 진짜 이유는 바쁨이 아니다. 편안함이다. 혼자 믿으면 아무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내 죄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만 골라 들을 수 있다. 내 신앙을 내가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소비다.


불 없이 따뜻할 수 있는가

장작 한 개비를 모닥불에서 꺼내 보라. 혼자서는 금방 꺼진다. 불 속에 있을 때만 타오른다. “교회 없이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불 없이 따뜻함만 원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믿도록 구원하지 않으셨다. 한 백성으로 부르셨다. 한 몸의 지체로 연결하셨다.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 — 그 안에 상처 주는 사람도 있고, 실망스러운 일도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교회를 떠나는 것이 답이 아닌 이유는, 교회의 머리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셔서 자기 피로 사신 공동체를, 우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버릴 수는 없다.

다음 주일, 알람이 울릴 때 생각해 보라. 당신이 빠진 자리에서, 당신을 돌아보려던 누군가가 빈 의자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면 너머에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비어 있을지 모른다.

그 빈자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마련해 두신 은혜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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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