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론 — 칼뱅의 영적 임재 vs 츠빙글리의 기념 vs 루터의 공재

성찬론 — 칼뱅의 영적 임재 vs 츠빙글리의 기념 vs 루터의 공재

#성찬#종교개혁#예배#교회론

분필로 그어진 한 줄

1529년 10월, 헤센의 필리프 방백은 신생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단일 전선으로 묶기 위해 마르부르크 성으로 종교개혁자들을 불러 모았다. 루터와 멜란히톤,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가 한 탁자에 마주 앉았다. 회담 의제 15개 항목 중 14개는 합의에 이르렀다. 마지막 한 항목, 성찬에서 막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루터는 그 자리에서 분필을 들어 탁자 위에 한 문장을 굵게 새겨 넣었다. “Hoc est corpus meum” — 이것은 내 몸이다. 츠빙글리가 무어라 응수해도 루터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두 진영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헤어졌고, 루터는 츠빙글리에게 작별 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과 우리는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

성찬 한 가지 때문에 종교개혁이 둘로 갈라졌다. 떡 한 조각, 잔 하나가 무엇이기에 같은 복음을 외친 사람들을 갈라놓았는가. 그리고 이 오래된 분열의 한복판에서, 칼뱅의 영적 임재론은 어떤 길을 열었는가. 이 질문은 교회사의 박물관에 놓인 유물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의 성찬상 위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네 갈래의 길

성찬을 둘러싼 견해는 본질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네 가지 대답이다. 빵과 잔이라는 표징(signum)과 그것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실재(res)는 어떤 관계인가?

1. 화체설 — 표징이 실재로 변한다 (로마 가톨릭)

라테란 4차 공의회(1215)가 공식 교리화하고 트리엔트 공의회(1551)가 종교개혁에 맞서 재확정한 화체설(transsubstantiatio)은,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의 실체(substantia)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고 형상(accidentia, 모양·맛·색)만 남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미사는 매번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제사가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정반대를 말한다.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0:12, 14

여기 “한 번”은 헬라어 ἐφάπαξ(에파팍스), 곧 단번에·결정적으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반복될 수 없고, 반복될 필요도 없다. 미사가 매번 다시 드려지는 제사라면,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는 불완전했다는 뜻이 된다. 화체설은 표징을 실재로 흡수시키면서, 의도와 무관하게 십자가의 충분성을 위협한다.

2. 공재설 — 표징과 실재가 물리적으로 공존한다 (루터)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의 육적 임재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가르친 공재설(consubstantiatio)은, 빵은 그대로 빵이지만 그 안에·함께·아래(in, cum, sub pane)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한다고 본다. 마르부르크의 분필 한 줄, “Hoc est corpus meum”이 그 입장의 결정적 함축이었다.

이 견해는 성찬에 무게를 회복시키는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신학적 부담이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신 이 매주 수많은 제단에 동시에 임하려면, 그분의 인성이 어디에나 편재(ubiquitas christi)해야 한다. 그런데 칼케돈 공의회(451)는 두 본성이 “혼동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연합한다고 고백했다. 인성이 어디에나 편재한다면, 그것은 인성이라기보다 신성의 속성이 흘러넘친 것이다. 성육신의 핵심 — 참 사람이 되심 — 이 흐려진다.

3. 기념설 — 표징만 남고 실재는 신자의 기억 안에 있다 (츠빙글리)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1525년 「두 가지 신앙고백」(Zwei Bekenntnisse)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이는 내 몸이다”의 est(이다)를 significat(의미한다)로 읽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성찬은 십자가를 기억하는 행위다.

그가 지킨 본문은 분명하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누가복음 22:19

여기 “기념”은 헬라어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다. 분명히 회상의 차원이 있다. 츠빙글리는 화체설의 마술화에 대한 정당한 반동으로, 신자의 주체적 믿음과 십자가에 대한 의식적 기억을 회복시켰다.

문제는 그가 회복한 것이 아니라 결락시킨 것이다. 임재의 차원이 사라졌다. 성찬은 인간이 위로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가 되고, 그리스도가 내려와 신자에게 자신을 주시는 차원은 흐려진다. 결국 성찬의 무게중심이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신자의 행위로 옮겨간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람의 일이 된다.

4. 영적 임재 — 표징은 그대로, 실재는 성령으로 신자에게 전달된다 (칼뱅)

칼뱅은 「기독교 강요」 IV권 17장에서 양극을 통과하는 길을 열었다. 빵은 변하지 않는다(화체설 거부).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 어디에나 편재하지 않는다(공재설 거부). 그러나 성찬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기념설 거부).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 고린도전서 10:16

여기 “참여함”은 헬라어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진정한 참여다. 칼뱅은 이렇게 정리했다 —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고, 신자는 땅의 빵을 받지만, 성령께서 멀리 있는 두 실재를 진실로 연결하신다. 그리스도가 빵 안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성령으로 그리스도께 들려 올라간다(sursum corda — 마음을 위로). 빵을 먹는 그 자리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으로 참여한다. 칼뱅은 이를 “신비”(mysterium)라 부르고, IV.17.32에서 “나는 이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다 풀 수는 없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이것이 영적 임재론(praesentia spiritualis)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장 7항이 이를 후대의 언어로 정리했다.

“합당히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외적 요소를 입으로 받음과 함께, 또한 내적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의 모든 은택을 진실로 그리고 실제로(really and indeed) 받고 그것을 먹는다. 다만 육적 또는 육체적으로(corporally or carnally)가 아니라, 영적으로(spiritually) 받는 것이다.”

“진실로 그리고 실제로” — 이 표현이 결정적이다. 영적이라 하여 가볍거나 가상이 아니다. 영적이기에 오히려 더 실재적이다. 성령은 환상이 아니라 능력이시다.


종말의 차원 — 성찬의 시간은 셋이다

세 견해의 결정적 차이는 시간에서도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1:26

성찬은 세 시간을 동시에 산다. 과거 — 십자가의 회상. 현재 —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미래 — “그가 오실 때까지”, 곧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향한 대망.

츠빙글리의 기념설은 과거를 살리고 현재와 미래를 흐렸다. 화체설은 현재의 임재를 마술화하고 십자가의 단번성을 무너뜨렸다. 칼뱅의 영적 임재만이 세 시간을 모두 보존한다. 우리는 기억하며, 지금 연합하고, 다가올 잔치를 대망한다.


한국 교회의 성찬 — 신학은 칼뱅, 실천은 츠빙글리

이제 우리 자신을 보자. 한국 장로교회의 강단은 영적 임재론을 가르친다. 그러나 실천은 거의 전부가 기념설로 평준화되어 있다. 진단을 셋으로 정리한다.

첫째, 빈도의 결락.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하려 한 것은 매주 성찬이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IV.17.43-46에서 “1년에 한 번만 성찬을 베푸는 관습은 마귀의 발명”이라고 단호히 비판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매주 성찬을 원했으나 시의회가 막아선 것을 평생의 유감으로 여겼다. 한국 교회의 연 4회(부활절·맥추절·추수감사절·성탄절) 시행은 종교개혁의 회복이 아니라, 라테란 4차 공의회가 정한 “1년에 1회 이상” 최저선의 변형에 불과하다.

둘째, 자기 점검의 결락. 사도의 명령은 무겁다.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1:27-29

종교개혁기 제네바는 성찬 일주일 전부터 가정 심방으로 성도의 신앙을 점검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성찬 시즌”(Communion Season)이라 하여 4~5일의 준비 예배를 가졌다. 오늘 우리는 성찬 직전 5분 묵상으로 이 명령을 다 지켰다고 여긴다. 그 사이에 무엇이 빠졌는가.

셋째, 의식적 무게의 결락. 분병위원이 떡 조각을 빠르게 돌리고, 작은 컵의 포도즙을 5분 안에 마시고, 곧 광고가 이어진다. 빵을 받는 그 손끝에서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나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신다는 자각이 있는가. 그 자각이 없다면, 신학은 칼뱅을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츠빙글리의 기념설보다도 얇은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회복의 길은 단순하다. 빈도를 적어도 매월로, 가능하면 매주로 회복할 것. 성찬 전 주일 설교에서 자기 점검을 가르치는 시간을 확보할 것. 분병·분잔의 순간에 침묵이나 시편 찬송으로 의식적 무게를 되돌릴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강단에서 praesentia spiritualis를 가르쳐 평신도가 빵을 받을 때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할 것.


분필 한 줄 너머

마르부르크 성의 탁자에 새겨졌던 그 한 줄은 지금도 우리 성찬상 위에 가로놓여 있다. 이것은 내 몸이다. 그 문장이 표징을 실재로 흡수한 화체설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빵 안에 가둔 공재설도 아니며, 그 문장의 무게를 비유로 흩어버린 기념설도 아닌 곳에서 — 빵은 그대로 빵이고,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며, 성령께서 그 사이를 진실로 연결하신다는 고백 안에서 — 우리는 다시 떡을 뗀다.

그리고 그 떡을 뗄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표징이 아닌 실재로 한 식탁에 앉을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다. 오늘의 작은 빵 조각은 그 잔치의 첫 입맛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받는 빵은, 모르고 받는 빵과 같은 빵이지만 같은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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