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자의 당혹감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결심한 어느 성도가 레위기 11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새우를 먹지 말라, 두 종류의 실로 짠 옷을 입지 말라. 그는 당혹스럽다. 주일 점심의 돈가스는 범죄인가. 한편 옆 장을 넘기면 “살인하지 말라”가 나온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도 유효하다. 같은 모세오경 안에 있는 두 명령이 어떻게 한쪽은 폐기되고 한쪽은 영속되는가.
이 당혹감이 정직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신자는 두 극단 중 하나로 밀려간다. 한쪽 끝에서는 율법주의가, 다른 쪽 끝에서는 반율법주의가 그를 기다린다. 한국 교회 안에도 이 두 절벽은 늘 가까이 있다. “모세의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신흥 집단이 있는가 하면, “은혜 시대에는 율법이 모두 끝났다”며 십계명의 권위까지 느슨하게 푸는 설교도 적지 않다. 두 오류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지만 뿌리는 같다. 구약 율법의 내적 구조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율법, 세 층위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고대 교회가 이미 알고 있던 통찰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미 체계화했고, 칼뱅은 「기독교 강요」 2권 7~8장에서 이를 개혁주의의 공식 유산으로 정돈했다(4권 20장은 이 율법의 시민적 함의를 별도로 전개한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세 층위가 공존한다.
도덕법(lex moralis)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자체를 반영한다. 십계명이 그 요약이며, 그 핵심은 창조 시에 이미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었다. 시민법(lex civilis 또는 judicialis)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신정 국가의 사회 질서를 규정한 법이다. 소가 사람을 받았을 때의 배상 규정, 도피성 제도, 토지 희년 등이 여기 속한다. 의식법(lex ceremonialis)은 성막과 제사, 절기와 정결 규례처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그림자였다.
이 세 구분은 임의의 분류가 아니다. 성경 자체가 기능상의 구별을 증언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하실 때, 그분은 도덕적 안식 원리와 의식적 형식을 구별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더 분명하게 말한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0:1, 14
제사와 정결 규례는 본래 그림자였고,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폐지가 아니라 성취로 흡수되었다. 돼지고기 금지가 오늘 구속력이 없는 것은 이 규정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정이 가리키던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인간의 분리라는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하늘이 내린 음식 보자기(행 10장)는 이 성취의 극적 선언이었다.
시민법 역시 단순히 유효하거나 무효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였던 동안 그 법조문은 그대로 효력을 가졌지만, 신약 교회는 이미 열방에 흩어진 순례 공동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섬세하게 정리한다.
하나님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사법적 법을 주셨으나, 그 국가와 함께 소멸되었고 이제 다른 나라들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의무지우지 않는다. 다만 그 법들이 담고 있는 일반적 형평(general equity)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장 4항
조문 자체는 이스라엘과 함께 끝났으나, 그 법이 담고 있는 형평과 정의의 원리는 오늘도 살아 있다. “네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신 22:8)는 조문을 문자 그대로 한국의 아파트 옥상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명령이 품은 이웃 생명에 대한 책임의 원리는 건축법과 공공 안전에 대한 신자의 윤리 의식으로 지금도 구속력을 가진다.
영속하는 도덕법 — 왜 십계명은 남는가
그렇다면 도덕법만은 왜 폐기되지 않는가. 바빙크는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단단한 답을 제시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표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민법은 한 민족의 상황에 묶여 있었고, 의식법은 한 구속사적 시기의 그림자였지만, 도덕법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는 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도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느슨하게 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차원까지 더 엄격하게 심화시키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마태복음 5:17-18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외칠 때, 그가 굳게 세운 것이 바로 이 영속하는 도덕법이다.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도덕법이 영속한다고 해서 신자와 불신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도덕법이 세 가지 용법(usus)을 가진다고 정리했다. 이 구분을 알지 못하면 율법 이야기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첫째 용법 — 거울(usus elenchticus).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이다. 산상수훈의 거울 앞에 서면 누구도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 용법이 없으면 복음은 값싸진다. 병을 진단받지 않은 환자에게 치료약은 사치품일 뿐이다.
둘째 용법 — 고삐(usus politicus). 율법은 타락한 사회에서 악의 질주를 억제하는 고삐다. 불신자 공동체에서도 살인과 절도가 금지되고 처벌되는 이유는, 도덕법의 요구가 양심과 사회 제도 속에서 일반 은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용법이 없으면 세상은 지탱되지 않는다.
셋째 용법 — 안내자(usus didacticus 또는 tertius usus). 그리고 이것이 개혁주의가 루터파와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중생한 신자에게 율법은 정죄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안내자로 다시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받은 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이제 율법을 아버지의 뜻이 담긴 지도로 기쁘게 읽는다. 다윗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라고 고백한 자리가 바로 이 셋째 용법의 자리다.
두 절벽 사이에서
이제 서두의 두 극단이 왜 모두 오답인지 분명해진다.
“모세의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의식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오류다. 그림자를 붙잡으려다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놓친다. 갈라디아서가 이미 한 번 싸워 이긴 싸움을 다시 꺼내는 셈이다. 반대로 “은혜 시대에는 율법이 모두 끝났다”는 주장은 영속하는 도덕법과 셋째 용법의 자리를 지워버린 오류다.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킨다. 본회퍼가 경고한 바로 그 함정이다.
한국 교회 강단이 붙들어야 할 길은 그 사이의 좁은 오솔길이다. 강대상에서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풀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향한 성취로 가리켜야 하며, 십계명을 풀 때는 정죄의 망치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순종하는 아들의 기쁨으로 강해해야 한다. 시민법의 한 조문을 오늘의 윤리에 옮길 때는 문자가 아니라 그 안의 형평을 길어 올려야 한다.
다 이루신 분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치셨을 때, 그분은 의식법의 모든 제사를 당신의 한 번의 제사로 삼키셨고, 도덕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한 순종으로 완성하셨다.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해방 때문에, 신자는 이제 율법을 감사의 문법으로 새로 읽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의 약속을 이렇게 기록했다.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8:10, 12
용서받은 마음의 안쪽에 새겨진 법. 그 법은 더 이상 돌판 위의 정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아는 자녀의 기쁜 규칙이다. 오늘 성경을 펼쳐 레위기를 만난 그 성도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 그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자는 실체를 잃은 적이 없고, 거울은 자녀를 비추기를 그친 적이 없다. 다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복음 안에서 완전히 달라졌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