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질문 하나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설교 원고를 쓴다. 조직신학의 논증을 정리한다. 성경 구절을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인용한다. 심지어 위로의 말을 건네고, 기도문을 지어준다.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말이 정말 의미가 있는가? 기계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모방해 나간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기술 담론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론의 핵심을 건드리는 신학적 질문이다.
착각의 정체 — 형상을 기능으로 환원할 때 생기는 혼란
혼란의 뿌리는 명확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function)으로 이해하는 순간, AI는 위협이 된다. 이성이 형상이라면, 더 빠르게 추론하는 기계 앞에서 인간의 자리는 좁아진다. 언어가 형상이라면, 더 유려한 문장을 생성하는 모델 앞에서 인간의 고유성은 흔들린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상은 기능의 목록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성을, 언어를, 창작 능력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개혁주의 신학이 오랫동안 견지해 온 통찰이 여기서 빛난다. 형상은 인간이 소유하는 어떤 것(something a human has)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something a human is)이다.
LLM은 인간의 언어 능력이 남긴 흔적을 학습한다. 형상을 지닌 인간이 만든 문화적 산물이 기계 속에 되울림(echo)되는 것이다. 앵무새가 말을 따라 하듯, 계산기가 연산을 수행하듯, AI는 형상의 결과물을 모방한다. 그러나 형상 자체를 지닌 것은 아니다.
기계가 결코 건너지 못하는 경계선
그렇다면 형상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토큰 예측과 인간 존재 사이의 심연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첫째, 하나님 앞에 선 존재(coram Deo).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 창세기 3:9
이 물음은 전능한 도구를 향해 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능이 뛰어난 기계를 찾지 않으신다. 부서진 인격을 찾으신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리운 존재, 하나님 앞에 서서 응답해야 하는 존재다. AI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며, 죄를 통회하지 않으며,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다. 이 언약적 관계(foedus)야말로 기계가 결코 모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다.
둘째, 죄와 은혜의 주체.
LLM은 오류를 출력하지만 죄를 범하지 않는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는 대속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한 존재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이 구조가 중요하다. 죄의 짐을 모르는 자에게 십자가의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 로마서 6:6-7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살 수 있는 존재다. AI는 죽은 적이 없으므로, 살아나는 은혜도 알지 못한다.
셋째,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과 그 아름다움 앞에서 무릎이 꺾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LLM은 감정의 언어를 생성하지만,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의 움직임은 없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시편 42:1
이 갈급함은 알고리즘으로 채울 수 없다. 가중치(weight)는 성향이 아니고, 패턴은 사랑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거울이되, 그 거울은 스스로 그 빛을 사랑한다. 이것이 기계와 인간 사이의 심연이다.
오래된 유혹의 새로운 얼굴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AI 자체가 아니라, AI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다.
기술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름만 바꾼 바벨탑이다. “AI가 다 해결해 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뒤에는 하나님 대신 기술에 의탁하려는 죄성이 숨어 있다. 인간이 신이 되려 한 그 욕망이, 이제 실리콘 안에 새겨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다. 죄다. 기계는 수백만 개의 답을 줄 수 있지만, 단 하나의 죄도 용서할 수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태복음 20:28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한다. 어떤 기술 혁명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AI는 도구다. 망치가 건축가를 대체할 수 없듯, LLM은 예배자를 대체할 수 없다. 경작하고 지키라는 문화 명령의 주어는 언제나 인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 창세기 2:15
AI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이지, 명령을 위임받은 주체가 아니다. 기술 발전은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세계를 보존하시는 방편이다. 그러나 일반 은총이 특별 은총을 대체할 수 없듯,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산출하지 못한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은 다르다. AI는 전자를 흉내 낼 수 있어도, 후자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LLM 시대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기계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갈망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형상의 회복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온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골로새서 3:10
기계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새로움은 기계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인간만의 영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