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1)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본

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1)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본

#인간론#하나님의형상#타락#성화

시리즈: 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 (3부 중 1부)


이 느낌의 정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순간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지는 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 뒤 찾아오는 자기 혐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분노, 시기, 탐욕을 마주한 뒤의 공허함. 그때 우리는 중얼거린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 자체에 이미 단서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동물은 자기 상태를 한탄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새는 더 높이 날지 못함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 오직 인간만은 — 자신이 “어떤 상태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감각을 갖고 있다.

이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은 그 기원을 인류의 첫 페이지에 기록해 두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בְּצֶלֶם אֱלֹהִים, betselem elohim). 성경이 인간에 대해 처음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우연히 출현한 고등 동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 하나님을 닮도록 의도된 존재다. 그리고 바로 이 원본이 있기 때문에 — 우리가 그 원본에서 벗어났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에 —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형상이란 무엇인가 — 왕의 초상화가 아닌 왕의 대리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외모를 떠올린다.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닮으셨다거나, 인간의 몸이 어떤 신적 원형을 본뜬 것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상”(צֶלֶם, tselem)은 그런 뜻이 아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형상”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가졌다. 왕은 자기 제국의 변방에 자신의 형상(석상)을 세웠다. 그 형상은 왕의 외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은 내 영역이다. 이 형상이 나를 대신하여 내 권위를 행사한다”**는 선언이었다. 형상은 곧 대리 통치자였다.

성경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를 때, 바로 이 의미가 작동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 세워진 살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서 대리하는 존재다. 그래서 형상 선언 직후에 곧바로 이런 명령이 이어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8

다스림(dominion)은 형상의 기능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돌보고, 가꾸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은 특권만이 아니라 책임이다. 좋은 왕이 백성을 섬기듯, 형상을 지닌 인간은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돌볼 사명을 받았다.


형상은 한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다

형상을 이해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형상은 이성이다” 혹은 “형상은 도덕성이다”처럼 형상을 인간의 한 부분, 한 능력으로 국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형상을 인간의 특정 부분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사람의 이성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 인간 전체를 —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정밀하게 포착했다. 형상은 인간이 소유하는 것(something a human has)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something a human is)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도,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 인간 존재의 전체(totus homo)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 만약 형상이 이성이라면, 지적 장애인은 형상이 덜한 존재가 된다. 형상이 도덕적 능력이라면, 중증 치매 환자는 형상을 잃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형상이 인간 존재 전체라면, 어떤 상태의 인간이든 — 태아이든,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다. 인권의 가장 깊은 뿌리가 여기에 있다.


형상의 세 차원 — 존재, 도덕, 기능

형상이 인간 전체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형상의 내용을 크게 세 차원으로 구분해 왔다.

첫째, 존재론적 차원이다. 인간은 이성, 양심, 의지, 감정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잃지 않은 것이다 — 불의한 사람도 생각하고, 무신론자도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 사회가, 문화가, 학문이, 예술이 가능하다.

둘째, 도덕적 차원이다. 최초의 인간은 단지 생각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 에베소서 4: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골로새서 3:10

이 구절들이 회복의 방향을 “의와 거룩”과 “지식”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타락 이전 인간이 바로 그 의와 거룩과 지식 안에 있었음을 함축한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은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 부른다.

셋째, 기능적 차원이다. 인간은 왕으로서 다스리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세계를 봉헌하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 창조 명령(cultural mandate)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봉사와 영광의 사명이다.

이 세 차원이 조화를 이룬 것이 인간의 원래 모습이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지식), 하나님 앞에 의로우며(도덕),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를 돌보는(기능) 존재. 이것이 인간 설계의 원본 도면이다.


거울의 비유 — 하나님을 향할 때만 참된 형상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이 있다. 형상은 자기 안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작동한다는 것이다.

칼뱅(Jean Calvin)은 인간을 거울(speculum)에 비유했다. 거울은 빛의 근원을 향할 때만 빛을 반사한다. 거울 자체에 빛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할 때만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때만 — 참된 형상으로 빛난다.

이것은 인간 이해에 대한 혁명적 선언이다. 현대 문화는 “진정한 나”를 내면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자기 안의 잠재력, 자기 안의 욕구, 자기 안의 고유성을 발견하면 비로소 “진짜 나”를 찾게 될 거라고.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기독교 강요의 첫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규정하기 어렵다.” — 칼뱅, 기독교 강요 I.1.1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른다. 나를 진정으로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형상은 관계적 존재다.


감정까지 형상이다 — 꿀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형상을 이성과 의지로만 이해하면, 인간 경험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감정의 차원이 포함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단지 지적으로 인식하도록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을 맛보고, 느끼고, 기뻐하고, 감동받도록 만들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 차이를 “꿀이 달다는 것을 아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혀로 맛보는 것”의 차이에 비유했다. 전자는 지식이고, 후자는 감각(sense)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주어졌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끌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감격하며,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경외와 기쁨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 — 이것이 형상의 작동 방식이다. 인간의 감정(affection)은 실수가 아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향해 설계된 안테나다.

이 점을 놓치면, 신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되고, 교리는 차가운 명제의 나열이 되며, 예배는 의무적 참석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온 존재로 —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통합하여 —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왕족의 폐허 — 그리고 질문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본 도면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돌보는 존재. 존재 전체가 형상이며, 그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 안에서 빛나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도면을 보면 볼수록,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 설계된 감정은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앉아 있고, 의와 거룩은 고사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양심을 거스르며, 세계를 돌보는 대리 통치자는커녕 세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데 익숙하다.

왕의 궁전이었던 곳에 서 있지만, 지붕은 무너지고 벽은 갈라졌다. 벽에 걸린 초상화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퇴색했다. 왕관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 아직 왕관임은 알 수 있지만, 그 영광은 상실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원래부터 그랬다. 인간은 본래 이런 존재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노력하면 다시 올라갈 수 있다. 교육과 의지와 자기 계발이면 충분하다.”

성경은 이 두 대답 모두 거부한다.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 그래서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그리고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왜 그런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진다.

그러나 먼저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자. 당신이 느끼는 그 “망가진 느낌”은, 당신이 본래 망가진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원본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깨진 것을 아파하는 그 감각 자체가, 당신 안에 아직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고귀한 원본은 어떻게, 왜, 얼마나 깊이 손상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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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