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의 무게
‘하느님’과 ‘하나님’. 한 글자 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단순한 표기 차이, 혹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관습적 구분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이 한 글자에는 우리가 신을 어떻게 고백하는가라는 질문이 걸려 있다.
국어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하느님’은 모두 중세 한국어 ‘하ᄂᆞ님’(아래아 포함)에서 갈라져 나온 변이형이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다.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갈래가 나뉜 것이다. ‘하나(一) + 님’이라는 어원 분석이나, ‘하늘(天) + 님’이라는 어원 분석은 모두 확정된 정설이 아니라, 각기 일정한 근거를 가진 해석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하나’로 읽을 때, 이 호칭은 유일신 고백과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성경이 가장 먼저, 가장 단호하게 선언하는 진리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신명기 6:4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여도 내가 네 띠를 동이리라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 이사야 45:5-6
‘오직 유일한 여호와’ — 쉐마 이스라엘의 핵심이 한국어 ‘하나님’이라는 호칭 안에 울림을 갖는다. 이것이 언어학적으로 확정된 어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해석이 성경의 유일신론과 깊이 조응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번역이라는 전장
19세기 후반,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선교사들은 전례 없는 질문과 마주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한국어로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이미 ‘상제(上帝)‘와 ‘신(神)’ 사이의 번역 논쟁(Term Question)이 수십 년간 이어진 바 있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하느님’, ‘천주’, ‘상제’, ‘신’ 등 여러 후보가 경합했다. 이 논쟁은 단일한 인물의 결단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助事)들의 오랜 토론과 번역 실천 속에서 점진적으로 수렴된 것이다.
개신교 진영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채택한 것, 그리고 가톨릭이 1977년 공동번역 성서를 전후하여 ‘하느님’을 공식 표기로 정착시킨 것 — 이 분기점에는 복합적인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개신교는 ‘하나님’이라는 호칭 안에 유일신론적 고백을 담아내게 되었고, 이것은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직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며, 그 존재와 완전함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한국의 성도들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그들은 이 고백을 입술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어라는 ‘자연적’ 언어 안에 신학적 진리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이 정당한가? 하나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만 자신을 계시하셨는가?
아퀴나스는 “은혜는 자연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고 말했다. 개혁주의 전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은혜는 자연을 완성할 뿐 아니라 회복한다. 죄로 일그러진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린다.
바빙크는 이 원리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로 풀어낸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와 양심 속에 자신을 드러내셨다(일반계시).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그 계시를 바르게 읽지 못한다. 특별계시 — 성경 — 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고 완성한다.
한국어가 ‘하나님’이라는 음절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음절이 유일신론적 울림을 가진다는 것은 일반계시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호칭이 참된 신앙고백이 되려면,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분을 알아야 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출애굽기 20:3
이 명령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름이 바르다고 신앙이 바른 것은 아니다.
이름은 고백이다
결국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한국어가 가진 선물이다. 그러나 선물은 열어야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는 단순히 네 글자를 발음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이 입술의 습관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가 — 그것이 한 글자의 무게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94문은 제1계명을 이렇게 풀어낸다.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께만 복종하는 것, 모든 선한 것을 오직 그분에게서만 기대하는 것,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 이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분 대신 의지하거나 섬기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안에는 이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아니,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이름은 호칭이 아니라 고백이며, 발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