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평이 아니라 편지다. 수신인은 이번 주에도 예배당 뒷문으로 먼저 들어와 마이크 선을 정리하고, 회중석이 차기 전에 사운드 체크를 마치고, 예배 직전에 화장실에서 잠깐 혼자 울었던 당신이다. 전주를 치면서도 마음이 텅 비어 있었고, “주 은혜 넘치네”를 입으로 따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왜 이러고 있지”라는 문장이 스쳐 지나갔던 당신. 이 글은 당신을 책망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한 번은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를 조용히 건네려고 한다.
먼저 하나만 분명히 하자. 번아웃은 당신의 믿음이 약해서 온 것이 아니다. 영성이 식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번아웃은 대개 가장 오래, 가장 성실하게, 가장 많은 자리에서 봉사하던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봉사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던 영혼이 마침내 내지르는 비명이다.
엘리야가 쓰러진 자리
성경은 사역자의 탈진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그것을 그대로 펼쳐 둔다.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내리고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혼자 맞섰던 엘리야가, 바로 다음 날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진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 열왕기상 19:4
영적 최고점 직후에 영적 최저점이 온다.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니다. 큰 봉사 뒤에 큰 공허가 따라오는 것은, 우리가 그 봉사를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내가 쓸모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로뎀 나무 아래 엘리야에게 내미신 것은 책망이 아니었다.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는 추궁이 아니었다. 천사가 와서 빵을 구워 먹이고, 재우고, 다시 깨워 먹였다(왕상 19:5-7). 이것이 하나님이 번아웃한 종에게 하신 첫 번째 처방이다. 신학 강의가 아니라 잠과 빵. 그 순서를 오늘 우리는 자주 뒤집는다. 쓰러진 봉사자에게 “기도가 부족했다”고 먼저 말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찬양팀이라는 특수한 전장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의 찬양 봉사자는 다른 어떤 봉사자보다 세 가지 긴장을 동시에 짊어진다.
첫째, 무대와 회중의 긴장이다. 당신은 회중이면서 무대 위에 있다. 예배자이면서 인도자다. 두 역할은 본질적으로 모순되지 않지만, 실제 주일 아침에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눈물이 나도 표정을 관리해야 하고, 은혜를 받으려는 순간에도 다음 소절의 코드를 떠올려야 한다. 이 “분할된 주의”가 수년간 누적되면, 어느 순간 당신은 예배 안에서 예배자가 아닌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아프다.
둘째, 완벽주의의 긴장이다. 음향, 박자, 화음, 인이어, 화면 전환. 실수 하나가 회중의 몰입을 깬다는 부담. “내 음이 튀면 예배가 무너진다”는 중압감. 이 중압감의 뿌리에는 예배를 내 연주의 합계로 보는 착시가 있다. 그러나 예배의 주체는 당신이 아니다. 성령이시다. 당신이 완벽했기 때문에 예배가 된 것이 아니다. 당신의 불완전한 연주를 통해서도 성령이 회중을 만나 주셨기 때문에 예배가 된 것이다.
셋째, 인정 욕구의 긴장이다. 찬양 봉사만큼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봉사가 드물다. 누가 오늘 잘했는지, 누가 오늘 흔들렸는지 모두가 안다. 칭찬과 비교가 일상이 된다. 처음에는 주를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 틈엔가 “인도자로서의 나”가 “예배자로서의 나”를 잡아먹는다. 번아웃은 바로 그 지점에서 터진다. 보이지 않는 기도실에서는 힘이 나지 않고, 보이는 무대에서만 간신히 힘이 나는 상태. 그 상태는 오래 갈 수 없다.
자기 영혼에게 말하라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인 습관이 필요하다. 시편 42편은 번아웃에 빠진 예배자의 자화상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5, 11
시인은 자기 영혼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건다. “내 영혼아, 너 왜 그러고 있니.” 이것이 영적 우울의 한복판에서 성도가 해야 할 일이다. 자기 영혼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 있지 말고, 자기 영혼에게 성경으로 대답하라. 감정의 조수를 진리의 바닥에 묶어 두라. 찬양팀 리허설 전 10분, 악기 앞에 앉기 전에 자기 영혼에게 한마디 하라. “오늘 나는 연주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서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무대와 예배석 사이의 찢어진 틈을 꿰매기 시작한다.
은혜가 족하다는 말의 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가장 들어야 하는 말이 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고린도후서 12:9-10
바울은 이 말을 가시가 뽑혀서 한 것이 아니다. 가시가 뽑히지 않는다는 답을 듣고 한 말이다. 번아웃이 당장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가 당신을 덜 부르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가 된다면, 그 약함은 더 이상 파괴가 아니라 통로다.
오늘 당신에게 드리는 네 가지
마지막으로 아주 구체적인 네 가지를 남긴다. 이것은 처방이 아니라 허락이다.
첫째, 안식을 죄처럼 여기지 말라. 한 달에 한 번은 회중석에 앉아라. 그 자리에서 울어도 괜찮다. 엘리야가 먼저 먹고 잔 것처럼, 당신도 먼저 쉬어야 섬길 수 있다.
둘째, 개인 예배를 봉사 리허설로 삼지 말라. 주중의 찬양은 주일 세트리스트가 아닌 전혀 다른 찬양으로 부르라. 무대와 연결되지 않은 하나님과의 시간을 따로 확보하라.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셋째, 동료에게 먼저 털어놓으라. 찬양팀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다. 리더에게, 혹은 같은 자리를 지키는 한 사람에게 “나 요즘 힘들다”고 먼저 말하라. 혼자 무너지지 말라. 번아웃은 대부분 혼자 감당하려 한 대가로 온다.
넷째, 떠나야 할 때를 분별하라. 몇 달, 혹은 한 해, 봉사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봉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주인이 쉬라 하시면 쉬어야 한다. 쉬는 것도 순종이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듣고 이 편지를 접자.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마태복음 11:28-30
예수님은 “멍에를 벗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멍에로 바꿔 메라”고 하셨다. 문제는 봉사 자체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메고 있는 그 멍에가 그분의 멍에가 아니기 때문에 어깨가 무너진 것이다. 오늘 밤, 그 무거운 멍에를 먼저 내려놓으라. 그리고 다음 주일, 악기 앞에 앉기 전에 속으로 한 문장을 말하라.
“주님, 오늘은 제가 인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예배드립니다.”
그 한 문장이 당신을 다시 살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