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은 평화가 아닙니다

휴전은 평화가 아닙니다

#윤리#기도#시사#평화#섭리

오늘, 이란과 미국 사이에 2주간 휴전이 발표되었습니다.

뉴스 알림을 보며 잠시 안도했을 것입니다. 주가가 반등하고, 유가가 내려가고, 해설자들은 “전환점”이라는 단어를 꺼내 듭니다. 그런데 가슴 한쪽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이 침묵이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휴전은 평화가 아닙니다. 총소리가 멈춘 것과 적대가 끝난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은 어디에서 오는가

야고보는 놀라울 만큼 직설적입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야고보서 4:1-2

전쟁의 뿌리는 지정학이 아니라 인간의 심장입니다. 석유와 패권과 안보 이익이 전쟁의 명분이 되지만, 그 명분 아래에는 욕심과 두려움과 지배욕이 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세속 정부가 칼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기독교강요 4.20.12). 전쟁은 타락한 세계의 비상구이지, 설계된 질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혼란 위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 시편 46:1-2

시편 기자는 산이 바다에 빠지는 상상을 합니다. 세계 질서가 통째로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낙관론이 아닙니다. 섭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전쟁을 허용하시되 다스리시며, 심지어 앗시리아 같은 제국을 “내 진노의 막대기”로 쓰시는 분입니다(사 10:5). 역사는 통제 불능이 아닙니다.


휴전이 줄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오늘의 휴전은 무엇입니까?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속게 됩니다.

로이드존스는 2차 대전 중 런던에서 설교하면서, 교회가 범한 가장 큰 실수는 국가의 나팔수가 된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교회가 승리를 축하하고 패배를 애도하는 국가 의례의 일부가 되었을 때, 복음은 국기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교회는 어느 나라의 편도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의 편에 섭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로마서 5:1

이 “화평”(εἰρήνη)은 전선의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적대가 십자가에서 철거된 상태입니다. 전쟁이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다면, 진정한 평화는 그 욕심이 해결된 자리,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리에서만 시작됩니다.

휴전 협정은 이것을 줄 수 없습니다. 외교관이 서명하는 문서는 포탄을 멈출 수 있지만, 심장의 적대를 멈추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것을 합니다.


분단국의 성도에게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이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미군 전략자산이 중동에 집중되면서 한반도의 억지력 공백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경제 지표는 흔들리고, 환율은 오르고, 불안이 식탁 위 뉴스가 되었습니다. 6.25를 겪은 나라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는 추상이 아니라 기억입니다.

그 시절 한국 교회는 피난처이자 복음의 선포 현장이었습니다. 부산 판자촌 천막교회에서 찬송이 울렸고, 전쟁고아를 품은 것은 국가 이전에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소명이 있습니다 — 불안 앞에서 복음을 붙드는 것.

불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립보서 4:6-7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은 “불안을 느끼지 말라”가 아닙니다. 그 불안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라는 명령입니다. 가져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이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전쟁의 불확실성 앞에서 이 고백이 닻이 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 디모데전서 2:1-2

“모든 사람”에는 적국도 포함됩니다. 칼뱅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자기 진영에 갇히는 순간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전쟁 지역의 영혼을 위해. 포탄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구호품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둘째, 지도자들의 지혜를 위해. 양쪽 지도자 모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겸손과 자제를 갖도록, 협상이 정의와 자비를 반영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셋째, 교회가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도록. 교회가 특정 국가의 승리를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는 목소리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넷째,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위해. 경제 불안과 안보 불안 앞에서,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기도를 하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εἰρηνοποιοί)는 갈등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그 화평을 만드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우리가 무릎 꿇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흘러갑니다.


포성 너머의 평화

시편 46편은 이렇게 끝납니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 시편 46:6-7

뭇 나라가 떠들고, 왕국이 흔들립니다. 2026년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소리를 내시면 땅이 녹습니다. 열방의 소란보다 하나님의 한 마디가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휴전이 2주 만에 깨질 수도 있습니다. 또는 협상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포성 너머의 평화입니다. 외교 테이블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서명된 평화입니다.

오늘, 그 평화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 이 세상이 아직 모르는 그 평화가, 전쟁의 상처 위에 흘러가도록.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