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깊이읽기 2부: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은 다르게 기도한다

삼위일체 깊이읽기 2부: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은 다르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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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가 기독교의 심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교리를 빼면 구원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많은 성도가 삼위일체를 교리로는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단일 인격의 하나님처럼 살고 기도한다.

삼위일체를 모르면 두 가지 질병이 생긴다. 첫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 — 감정이나 행위에서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둘째, 성화의 방향을 잃는다 —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이 두 질병의 치료제다.


세 분과의 구별된 교제

신자는 삼위 하나님과 교제한다. 그런데 이 교제는 막연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다. 세 위격 각각과 구별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부와의 교제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부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에베소서 1:4

성자와의 교제는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자는 부요하셨으나 가난하게 되셨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은혜가 교제의 바탕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8:9

성령과의 교제는 위로와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위로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요한복음 14:16-17

삼위일체는 우리가 거하도록 초대받은 집이다. 성경은 이 교제의 실체를 이렇게 증거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한일서 1:3


기도 한 번 안에 삼위일체 전체가 있다

기도는 삼위일체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우리는 성부께 기도하되, 성자를 통해 나아가며,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이 구조를 성경은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에베소서 2:18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고, 성자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며, 성부가 그 기도를 들으신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로마서 8:15-16

기도 한 번 안에 삼위일체 전체가 작동하고 있다. 매주 예배 끝에 듣는 축도가 바로 이 고백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후서 13:13

이 축도는 형식이 아니다. 세 분 하나님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감싸고 계신다는 복음의 선언이다.


고난 속에서 세 분이 동시에 안아주신다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은 고난을 다르게 견딘다. 고난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동시에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적 사건이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히브리서 9:14

성자가 자신을 드리시고, 성부가 그 제물을 받으시며, 영원하신 성령이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이 구조는 동일하게 작동한다. 성부의 섭리 안에서 고난은 무의미하지 않다. 성자의 동정 안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히브리서 4:15

그리고 성령의 중보 안에서, 기도할 말조차 찾지 못할 때에도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탄식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로마서 8:26

고난의 한복판에서 성부의 계획, 성자의 동정, 성령의 탄식이 동시에 우리를 감싸고 있다.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세 겹의 위로를 받는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세 기둥

구원의 확신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많은 성도가 감정(“은혜를 느꼈으니까”)이나 행위(“나름 잘 살았으니까”)에서 확신을 찾는다. 그러나 감정은 변하고, 행위는 불완전하다. 이런 확신은 늘 흔들린다.

삼위일체적 확신은 다르다. 세 기둥이 동시에 받치기 때문이다. 창세 전 성부의 작정 — 나를 선택하신 것은 내 공로가 아니므로, 내 실패로 취소되지 않는다. 성자의 공로 —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으므로, 내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성령의 증언 —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증하신다.

이 세 근거 중 하나라도 빠지면 확신은 무너진다. 성부의 작정이 없으면 선택의 이유를 내 안에서 찾게 되고, 성자의 대속이 없으면 구원의 근거가 불안해지며, 성령의 증언이 없으면 확신이 지적 동의에 머문다.


삼위의 교제 안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요한복음 17:21

놀라운 기도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교제 — 그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다. 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만의 구원관이다.


삼위일체를 위협하는 왜곡들

이 교리가 중요한 만큼, 왜곡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왜곡이 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가르치는 집단이 있다. 그러나 피조물이 어떻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겠는가? 유한한 존재의 죽음으로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없다.

성령을 인격이 아닌 ‘힘’ 또는 ‘에너지’로 가르치는 집단도 있다. 그러나 힘이 어떻게 탄식하며 기도하겠는가? 로마서 8:26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인격적 존재임을 증거한다.

한 하나님이 때에 따라 역할만 바꾸신다고 가르치는 양태론적 왜곡도 여전하다. 이미 살펴보았듯, 요단강에서 세 위격은 동시에 나타나셨다.

한국적 맥락에서 특별히 경계할 것이 있다. 유교적 위계 감각이 삼위일체를 ‘성부 > 성자 > 성령’이라는 서열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세 위격은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샤머니즘적 영성이 성령님을 인격이 아닌 ‘영적 힘’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성령님은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바울의 경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갈라디아서 1:8


무릎 꿇는 신학

삼위일체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대로, 완전히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해가 경배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해보다 무릎 꿇기가 먼저다.

매주 예배 끝에 선포되는 축도를 다시 들어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후서 13:13

이것은 형식적인 마무리 인사가 아니었다. 세 분 하나님이 — 성자의 은혜로, 성부의 사랑으로, 성령의 교통으로 — 지금 이 순간 당신을 감싸고 계신다는 복음의 선언이었다.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은, 이 축도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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