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둑질은 안 했어요”
목회자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해 보라고 하면 한국 교회 성도의 절반 이상이 비슷한 곤혹을 겪는다. 도둑질·간음·살인 같은 큰 죄는 없는데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 죄는 곧 행위다.
죄를 행위로만 보는 시선은 자연스럽지만 결정적으로 평면적이다. 그것은 빙산의 수면 위 부분만 보고 그 아래 산처럼 잠긴 본체를 놓치는 시선과 같다. 이 평면화 위에서 한국 교회의 강단은 두 갈래로 굽었다. 한쪽은 “더 잘하라” 외치는 도덕주의로 굽었고, 다른 한쪽은 “이미 다 용서받았으니 괜찮다” 다독이는 값싼 은혜로 굽었다. 둘 다 죄에 대한 진단이 부정확해서 처방이 한쪽으로 기운 결과다.
종교개혁 이래 개혁주의 신학은 죄를 다룰 때 결코 행위 한 차원에서 멈추지 않았다. 칼뱅·오웬·바빙크가 일관되게 가르쳐 온 좌표계는 다음과 같다.
죄에는 세 차원이 있다. 오염(pollutio) — 본성의 부패 죄책(reatus) — 법정의 부채 형벌(poena) — 마땅한 진노
한 죄가 동시에 세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구원이란, 이 세 그림자를 한꺼번에 거두시는 그리스도의 단일하지만 통합적인 사역이다. 진단을 정확히 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만함도 보이지 않는다. 거꾸로 말해, 자기 죄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큼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된다.
첫째 차원 — 오염: 행위 이전의 상태
다윗은 자기 인생 최악의 행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시편 51:5
밧세바 사건이라는 행위를 회개하던 다윗이 곧장 자신의 기원까지 내려간다. 그가 발견한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 그 행위는 갑자기 튀어나온 돌발 사고가 아니라, 잉태된 그 순간부터 자기 안에 있던 부패한 본성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었다. 행위 이전에 상태가 있다.
예레미야는 같은 진단을 더 차갑게 내린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예레미야 17:9
바울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신음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로마서 7:18
이것이 오염(pollutio)이다. 더러움이 마음의 표면에 묻은 얼룩이 아니라, 마음의 조직 자체에 스며든 부패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2.1-3에서 길게 논증한 전적 부패(corruptio totalis)는 인간의 모든 면이 최대치로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차원(지·정·의)이 죄에 영향받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말이다.
이 차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은 중생과 평생의 성화다. 에스겔이 새 언약의 약속으로 받은 말씀은 이것이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에스겔 36:2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요한복음 3:5-6
중생은 한 번 일어나지만, 그 새 마음을 따라 옛 부패의 잔여물과 평생 싸우는 것은 성화의 매일이다. 오웬이 「내주하는 죄의 본성과 능력」(On the Mortification of Sin)에서 한 그 유명한 명령 — “You must be killing sin or it will be killing you” — 은 바로 이 차원에 대한 처방이다. 칭의된 신자도 죄와의 싸움이 면제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싸울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둘째 차원 — 죄책: 법정 앞에 선 부채
죄는 본성의 부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선언된 법정의 부채다. 바울은 인류 전체를 한 법정에 세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 로마서 3:19
“심판 아래”(헬라어 ὑπόδικος, hypodikos)는 법정 용어다. 모든 인류가 피고석에 서 있다. 변명할 입은 막혔고, 정죄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흘러내렸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로마서 5:18
이것이 죄책(reatus)이다. 본성의 더러움(macula)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 곧 내가 법정에서 어떤 신분으로 서 있는가의 문제다. 더러움이 내 안의 문제라면, 죄책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다.
이 차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은 칭의다. 칭의는 본성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선언하는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율법의 의를 적극적으로 충족하심)과 수동적 순종(율법의 형벌을 짊어지심)이 함께 작동해, 우리의 부채는 그분 계좌로 옮겨지고 그분의 의는 우리 계좌로 옮겨진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5:2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로마서 5:1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가장 깊은 함정이 드러난다. 이 차원이 가장 자주 들리지만 가장 자주 놓쳐진다. 강단에서 “예수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흘러나오지만, 그것이 법정에서 일어난 단번의 외부적·법적 선언이라는 사실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들이 자기 행위가 흔들릴 때마다 칭의 자체가 흔들린다고 착각한다. 칭의는 내 행위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내 행위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것은 칭의가 아니라 나의 인식이다.
셋째 차원 — 형벌: 마땅한 진노
죄책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형벌 없는 사면은 자비가 아니라 거룩의 부정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로마서 6:23
진노·죽음·지옥 — 이것이 죄책의 결과로 따라오는 형벌(poena)이다. 그리고 이 차원이야말로 십자가가 가장 정면으로 응답한 지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갈라디아서 3:13
형벌은 칭의의 순간에 법적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그 형벌이 드리운 모든 그림자 — 죽음·눈물·고통·부패 — 가 마지막까지 사라지는 것은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요한계시록 21:4
한 그리스도, 세 차원
세 차원은 분리될 수 없으나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셋 모두가 한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된다.
| 죄의 차원 | 그리스도의 사역 | 적용 시점 |
|---|---|---|
| 오염 (pollutio) | 부활 생명에 신자가 연합 | 중생(일회) + 성화(평생) — 본성의 갱신 |
| 죄책 (reatus) | 능동적·수동적 순종 → 의의 전가 | 칭의 — 일회적 법정 선언 |
| 형벌 (poena) |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심 | 영화 — 마지막 그림자까지 제거 |
오웬이 즐겨 말한 대로, 죄책은 한 번에, 오염은 매일에, 형벌은 마침내 처리된다. 시간 구조가 다르지만 사역의 주체는 동일하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는 별개의 그리스도가 아닌, 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서 흘러나오는 한 은혜의 세 흐름이다.
여기서 잘못된 진단이 어떤 임상적 결과를 낳는지 분명해진다.
- 오염만 보면 — 끝없는 자기개선과 율법주의로 추락한다. 내가 더 거룩해져야 내가 의로워진다는 거꾸로 된 복음(갈 3:3).
- 죄책만 보면 — 값싼 은혜와 반(反)율법주의로 추락한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죄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위장된 복음(롬 6:1).
- 형벌만 보면 — 두려움의 종교, 노예의 영으로 추락한다. 지옥은 면했지만 평생 진노 앞에 떨고 있는 종교(롬 8:15).
세 차원을 동시에 십자가 앞에서 다루지 않으면 신앙은 반드시 어느 한쪽으로 굽는다.
다윗의 회개가 짚은 세 차원
가장 위대한 회개의 시편인 시편 51편이 정확히 이 좌표계를 따라간다.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시편 51:2 (오염)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 시편 51:4 (죄책)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시편 51:11 (형벌의 두려움)
다윗은 한 행위(밧세바 사건)를 회개하면서 그 행위가 드리운 세 그림자를 모두 짚는다. 본성의 더러움(2절), 법정의 죄책(4절), 마땅한 형벌(11절). 그리고 이 셋을 동시에 들고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 회개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가 있다. 우리의 회개가 한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아직 자기 죄를 충분히 본 것이 아니다. 행위만 회개하고 본성은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도덕주의에 머문다. 죄책만 신경 쓰고 오염은 외면한다면 성화 없는 신자가 된다. 형벌만 두려워하고 법정의 화평을 모른다면 자녀가 아닌 종으로 산다.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이 충분해진다
한국 교회 강단이 회복해야 할 것은 더 큰 목소리의 은혜 외침이 아니라, 더 정확한 죄의 진단이라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죄를 행위로만 보는 자는 그리스도를 행위 보정자로만 본다. 죄를 본성·법정·진노 세 차원에서 통째로 보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온전한 구주로 본다.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곧 은혜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결정한다. 이 진리가 종교개혁의 잊혀진 유산이다. 칼뱅이 강요 2권에서 인간의 비참(miseria hominis)을 그토록 길게 논증한 까닭, 오웬이 청교도 시대 가장 두꺼운 책들을 죄 죽이기에 바친 까닭, 바빙크가 「개혁교의학」 3권 전체를 죄와 그리스도 사역의 정밀한 좌표계에 할애한 까닭은 하나다 — 충분히 진단하지 않은 죄에는 충분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
세 차원의 부패와 부채와 진노 앞에 선 자기 자신을 보라. 그리고 그 셋 모두를 한 번에 짊어지신 한 분을 보라. 그분의 능동적 순종이 의의 빈자리를 채우셨고, 수동적 순종이 형벌의 잔을 비우셨고, 부활 생명이 본성의 부패를 새 마음으로 갈아 끼우신다. 거기서, 비로소 충분한 복음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