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을 믿었는데, 왜 이렇게 공허한가

수십 년을 믿었는데, 왜 이렇게 공허한가

#구원론#믿음#자기검증#성화

당신은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세례도 받았다.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 이상을 매주일 예배당에 앉았다. 헌금을 했고, 기도 제목을 나눴고, 찬양 가사를 입술로 따라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내 믿음은 진짜인가?

이 질문은 새신자의 질문이 아니다. 극적인 타락에서 돌아온 사람의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너무 오래, 너무 익숙하게 앉아 있었기에 비로소 떠오르는 질문이다. 예배가 끝나면 아무 감동도 없고, 성경을 읽어도 활자가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고, 기도를 하면서도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느낌. 바깥에서 보면 성실한 성도인데, 안에서 보면 텅 비어 있다.

이 글은 그 공허함 안에 사는 당신에게 쓴다.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단하고, 그리고 초청하려 한다.


귀신도 아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르고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래전부터 믿음을 세 종류로 구분해 왔다.

첫째, 역사적 믿음(fides historica). 성경의 사실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부활했다는 것을 머리로 수긍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야고보서 2:19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만으로는 믿음이라 부르기 어렵다.

둘째, 임시적 믿음(fides temporaria). 복음을 듣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한동안 뜨거운 열심을 보이지만, 뿌리가 없어 시험이 오면 시들어버리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것을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하셨다.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마태복음 13:20-21

칼뱅은 기독교 강요 3권 2장에서 임시적 믿음이 택자의 믿음과 외적으로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차이는 뿌리가 심장까지 내려갔는가에 있다.

셋째, 참된 믿음(vera fides). 이것만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 Notitia(지식) — 복음의 내용을 아는 것
  • Assensus(동의) — 그것이 참임을 인정하는 것
  • Fiducia(신뢰) —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붙잡고 전 존재를 내어맡기는 것

오래 교회를 다닌 많은 이들에게 notitia와 assensus는 있다. 성경 지식이 있고, 기독교 교리가 참이라고 수긍한다. 그런데 fiducia —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맡기는 인격적 의탁 — 가 빠져 있다. 지식은 있으나 신뢰가 없는 상태. 의자를 바라보기만 하고 앉지 않는 것이다.


큰아들은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대개 둘째 아들에게 시선을 준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마지막 장면은 큰아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었다. 수년간 밭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왜인가?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큰아들의 신앙은 거래였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한다.”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 자체를 기뻐한 적은 없었다. 이것이 형식적 신앙의 정확한 초상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론에서 이 지점을 날카롭게 묻는다. 참된 신앙 감정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시편 27:4

다윗이 원한 “한 가지”는 축복도, 건강도, 승리도 아니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질문을 당신 자신에게 던져보라 — 구원받은 것이 기쁜가, 아니면 구원하신 분 자체가 아름다운가? 천국에 가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좋은가?

이 두 질문의 답이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

여기까지 읽으며 불안해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인가?” 잠깐 멈추어야 할 곳이 여기다.

죽은 영혼은 자신이 죽었는지 묻지 않는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고백 자체가, 역설적으로,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아직 일하고 계신다는 흔적일 수 있다. 형식적 종교에 완전히 안주한 사람은 이런 질문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죄에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의 무감각함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당신이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괴롭다는 것 — 이것은 살아있는 무언가가 안에서 저항하고 있다는 증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믿음의 확신은 구원에 속한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즉, 확신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같은 고백서 14장 3항은 참된 믿음이 “정도와 강도에 있어 다양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작은 믿음도 참된 믿음이다.

한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곧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 마가복음 9:24

이 모순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이사야 42:3

작은 믿음이 큰 그리스도를 붙들 수 있다.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구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자신의 믿음을 분석하는 것을 멈추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치유받은 방법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3:14-15

다음으로, 바울의 권면을 따르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 고린도후서 13:5

시험하라(dokimazete). 이 단어는 금속을 불에 달궈 순도를 검증하는 야금술 용어다. 자기 검증은 정죄가 아니라 정련이다. 요한일서를 천천히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 죄를 빛 앞에 드러내고 고백하는가? 삶의 방향이 하나님 말씀 쪽을 향하는가? 형제를 향한 의지적 사랑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로 돌아가자. 큰아들이 분노하며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는가? 쫓아내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셨다. 지금 이 공허함, 이 불안, 이 질문 — 이것이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당신을 권하고 계신 것일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수십 년의 형식적 신앙도, 냉랭한 마음도, 큰아들의 교만도 —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위해 죽으셨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는 예외 조항이 없다. 지금, 처음인 것처럼, 그분께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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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