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애의 분노는 정당한가
1부에서 우리는 물었다. 범죄자의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는 선언이 참된 회개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답했다 — 열매 없는 선언만으로는 될 수 없다고.
그러나 이신애의 이야기에는 더 깊은 층이 있다. 그녀의 분노는 범인의 회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판별을 넘어선다.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 속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정당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외친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 요한계시록 6:10
이 외침이 불신앙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믿기에 하는 기도다. 이신애의 분노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고통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놓으신 정의의 감각이 울부짖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같은 것이 아니다
이신애가 겪은 혼란의 핵심에는 하나의 신학적 혼동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같은 차원의 사건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과 범인의 관계, 이신애와 범인의 관계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법정적 선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선언이다. 바울은 이렇게 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1
그러나 이 수직적 화해(하나님과 죄인의 관계)가 수평적 책임(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을 자동으로 해소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구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마태복음 5:23-24
먼저 피해자에게 가라. 그 후에 제단으로 오라. 하나님은 수평적 화해 없는 수직적 예배를 기꺼이 받지 않으신다.
구약 율법은 이것을 더욱 명확히 한다. 이웃에게 해를 끼친 자의 속죄 규정을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죄를 지었으니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억압하거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속여 거짓 맹세를 하는 등 누구든지 이같이 행하여 범죄하면 그 빼앗은 것이나 억압하여 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것이나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지며.” — 레위기 6:2-5
배상이 먼저다. 그 다음에 제사다. 이것이 성경의 순서다.
은혜는 정의를 지우지 않는다
중세 신학자들 사이에 전해진 명제가 있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
이 원리는 용서의 문제에 정확히 적용된다. 하나님이 은혜로 죄인을 용서하실 때, 그 은혜는 하나님이 친히 창조 질서 안에 세우신 정의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다윗의 사례가 이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는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후, 나단 선지자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셨다. 그러나 결과는 남았다. 아이는 죽었고,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았다. 영적 용서와 시간 안에서의 결과는 별개다.
바울은 국가의 법적 권위에 대해 이렇게 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로마서 13:1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 로마서 13:4
국가의 형벌권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다.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형벌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두 질서 — 은혜의 질서와 정의의 질서 — 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법적 처벌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처벌을 기꺼이 수용하는 데서 회개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 — 함께 우는 것
그렇다면 이신애 같은 사람이 교회에 왔을 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우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로마서 12:15
욥의 세 친구가 처음 왔을 때, 그들은 칠 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 가장 큰 위로였다. 그들이 말을 시작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신애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다. 설교하기 전에, 교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 고통 옆에 앉아야 한다.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2차 가해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피해자에 대한 압박 도구로 사용될 때, 복음은 오히려 폭력이 된다. 피해자의 치유가 가해자의 회개 속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마태복음 6:14-15
이것은 엄중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감정적 결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씨앗이 자라듯 과정이다. 아들을 살해당한 어머니에게 “지금 당장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상처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용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걷는 것이다.
십자가 — 정의와 자비가 만나는 유일한 자리
여기서 가장 깊은 질문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는 서로 모순되는가?
아니다. 십자가가 그 답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결코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그 대가를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완전히 실현되었다. 죄의 값이 남김없이 치러졌다. 동시에 자비가 흘러나왔다. 정의가 희생된 것이 아니다.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에 자비가 가능해진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마태복음 27:46
이 절규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값싼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은혜는 받는 자에게는 거저이지만, 주시는 분에게는 아들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신애의 분노가 역설적으로 복음에 가장 가까이 서 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 이렇게 쉽게 용서가 성립될 수 없다고. 맞다. 진정한 용서는 쉽지 않다. 십자가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신애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고통을 피해 가지 않았다. 십자가는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교회가 보여야 할 응답
밀양이 한국 교회에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영화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된 이유는, 관객들이 그 장면에서 허구가 아니라 실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 자체의 실패가 아니다. 복음 전달의 실패다.
수직적 화해만 선언하고 수평적 책임을 삭제한 기형적 회개 문화. 가해자의 “은혜 받음”만 축하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반쪽짜리 목양. “용서하라”는 명령을 피해자에게 먼저 들이미는 전도된 순서. 이것들이 밀양의 그 장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참된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가해자에게: 당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그 용서는 당신을 피해자 앞에 더 낮아지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책임의 면제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할 용기의 근거다.
피해자에게: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 분노를 억누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노를 들으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도 아들을 잃으셨다.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에게: 먼저 울라. 가르치기 전에 울라. 그리고 회개를 쉽게 선언해 주지 말라. 열매를 기다리라. 정의와 자비를 분리하지 말라. 십자가에서 둘은 하나였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사무엘상 15:2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값싼 고백이 아니다. 부서진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이다. 그 순종은 하나님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 입힌 이웃을 향해서도 몸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밀양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