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이 던진 질문 1부: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말의 무게

밀양이 던진 질문 1부: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말의 무게

#회개#용서#밀양#구원론

교도소 면회실에서 무너진 것

영화 “밀양”(2007)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살인이 아니다. 교도소 면회실이다.

아들을 살해당한 어머니 이신애는 기독교에 입문한 뒤,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삼키고 그 자리에 섰다. 그런데 범인은 평온한 얼굴로 말한다. “저는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이신애는 무너진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고?”

이 장면이 수많은 관객의 분노를 산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의 용서라는 교리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 용서를 입에 담은 사람이 잘못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메타노이아 — 마음의 혁명

신약 성경에서 “회개”로 번역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성” 정도의 가벼운 변화가 아니다. 삶 전체의 방향이 뒤집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장 2항은 회개를 이렇게 정의한다.

“복음적 회개란 구원의 은혜로서, 이로 말미암아 죄인은 자신의 죄들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더러움과 혐오스러움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비를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자신의 죄로 인해 슬퍼하고 거기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순종의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하려 애쓴다.”

여기에 세 가지가 겹쳐 있다.

첫째, 지적 인식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것이 왜 하나님 앞에서 죄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내가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시편 51:1-3

“내가 내 죄과를 아오니” — 이것은 막연한 죄의식이 아니다. 자신이 파괴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이다.

둘째, 감정적 슬픔이다. 그러나 아무 슬픔이나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결정적인 구별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고린도후서 7:10

세상 근심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다. “잡혔다.” “처벌받는다.”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본다.” 이 슬픔의 중심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슬픔이다. 결과가 아니라 본질을 향한 애통이다.

가룟 유다와 사도 베드로는 둘 다 예수를 배반한 후 슬퍼했다. 유다는 은전 삼십을 돌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십자가가 아니라 밧줄로 끝났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 주님의 눈을 마주치고 밖에 나가 통곡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새로운 삶을 낳았다. 두 슬픔은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셋째, 의지적 전환이다. 회개의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돌아서다”라는 뜻이다. 걸어가던 방향에서 몸을 돌려 하나님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식과 슬픔이 이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감상(感傷)이다.

이 세 요소는 순서가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 지적 인식 없는 감정은 히스테리다. 의지적 전환 없는 인식은 지식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회개다.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자기기만

그렇다면 밀양의 그 범인은 어떠한가?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는 그의 선언이 참된 회개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야 한다 — 그 선언만으로는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참 회개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징표일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자기기만 능력에 대해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 예레미야 17:9

죄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는 죄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종교적 언어는 이 자기기만의 완벽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용서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이 피해자에 대한 책임, 죄의 결과에 대한 직면, 삶의 방향 전환 없이 선언될 때 — 그것은 복음의 언어를 빌린 자기 위로일 가능성이 높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곧바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고통당하셨는지를 더 깊이 느낀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라는 선언을 이미 들은 후에도 시편 51편을 썼다. 용서받은 후에도 죄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용서받은 죄인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겁게 느낀다.


삭개오가 보여준 것

그렇다면 참된 회개의 열매는 무엇인가? 성경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이렇게 선언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누가복음 19:8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누가복음 19:9

삭개오는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피해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배상이 참 회개의 첫 번째 열매였다. 예수님이 “배상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아니다. 삭개오가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참된 회개는 피해자를 향한 책임을 명령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감당한다.

세례 요한의 경고가 여기서 울려 퍼진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마태복음 3:8

열매 — 이것이 기준이다. 말이 아니라 열매. 선언이 아니라 삶. 참 회개는 입에서 나오는 고백과 삶에서 나오는 변화가 하나로 이어질 때에만 참이다.

밀양의 범인에게 돌아가 보자. 그가 이신애 앞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어야 할 것이 있다. “제가 당신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저는 그 빚을 이 생에서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피해자를 향해 먼저 몸을 돌렸듯이.


그런데 — 만약 그가 정말 회개했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만약 — 정말로 만약 — 그 범인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다면? 미숙한 표현이었을지언정, 성령께서 진정으로 그의 마음을 바꾸신 것이라면? 그렇다면 피해자인 이신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해야만 하는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녀의 신앙이 부족한 것인가?

이 질문은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보다 더 무거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해자의 고통 한가운데서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신애의 분노 속에는 정의에 대한 외침이 있다. 그 외침이 과연 은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 아니, 은혜 자체가 그 외침을 품고 있는 것인지 — 이것을 다음 편에서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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