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교육의 신학 — 훈계와 사랑의 균형

자녀 교육의 신학 — 훈계와 사랑의 균형

#가정#자녀양육#훈계#한국교회

식탁에서 무너지는 가정

저녁 식탁에서 한 어머니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에게 소리친다. “기도 안 하면 하나님이 너 벌하신다고 했지!” 다음 날 같은 아이가 같은 잘못을 했을 때 어머니는 피곤해서 못 본 척 넘긴다. 일주일 뒤 또 같은 잘못을 했을 때 이번엔 회초리를 든다. 그리고 그 밤 어머니는 침대 옆에서 운다. “내가 또 분노로 그랬다.

이 풍경에서 자녀가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이 아니다. 부모의 기분을 읽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모의 분노와 같은 분이다라는 신학이다. 한국 가정에서 매일 재생되는 이 장면이 한 세대 안에 신앙을 단절시킨다.

이 글은 자녀 양육 일반론이 아니다. 훈계와 사랑의 균형 그 자체에 좁게 초점을 맞춘다. 부모의 청지기직 일반은 다른 글에서, 가정예배는 또 다른 글에서, 사춘기 분리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묻는다. 훈계와 사랑이 한 호흡으로 묶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두 절벽 — 권위주의와 친구 부모

한국 부모는 두 절벽 사이를 흔들린다. 한쪽은 권위주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로 시작해 자녀의 모든 선택을 부모의 명예와 묶는다. 회초리를 든 손에 “이게 다 너 잘되라고”라는 신학적 미사여구를 입힌다. 폭력적 훈계가 영적 언어로 포장되는 순간, 자녀의 영혼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학습한다 —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고, 사랑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다른 쪽은 친구 부모다. 권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수입된 담론이 지금은 다른 형태의 학대가 되었다. 자녀가 잘못해도 “우리 아이는 자존감이 다칠까봐” 훈계하지 않는다. 모든 욕구를 들어주며 자녀를 가정의 중심에 둔다. 결과는 잠언이 거듭 경고한 그대로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 잠언 13:24

훈계 회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잠언은 그것을 미움이라 부른다. 자녀를 가정의 우상으로 삼는 부모는 결국 자녀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인 인간으로 자라게 한다.

두 절벽 모두 사랑이다. 그러나 둘 다 신학이 없는 사랑이다. 권위주의 부모는 자기가 실패자로 보일 두려움을 자녀에게 투사한다. 친구 부모는 자녀에게 미움받을 두려움을 자녀에게 투사한다. 둘 다 자녀의 유익이 아니라 부모의 정서가 중심이다.

본문이 두 단어를 한 호흡에 묶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에베소서 6:4

이 한 절은 훈계와 사랑의 균형을 한 문장에 압축한다. 주목해야 할 순서가 있다. “노엽게 하지 말고”가 먼저다. 그다음에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가 온다. 본문은 훈계의 정당성을 인정하되, 그 훈계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방식이라면 이미 본문 밖이라고 단언한다.

헬라어 paideia(교양)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한 사람을 성숙으로 이끄는 전 과정의 형성이다. nouthesia(훈계)는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권면이다. 결정적인 것은 두 단어 모두 주의(en kyriou)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분노로 행하는 훈계는 — 그것이 아무리 자녀의 행동을 교정한다 해도 — 주의 훈계가 아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잠언 22:6

이 구절은 한국 부모에게 동시에 위로와 짐이 된다. 신실히 가르치면 자녀가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마땅히 행할 길”의 히브리어 al-pi darko는 직역하면 “그의 길에 따라”다. 두 해석이 있다. 보편적으로 옳은 길로 보는 견해와, darko — “그의 길” — 곧 그 자녀 고유의 기질에 맞춘 길로 보는 견해. 매튜 헨리도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두 해석은 배타적이지 않다. 부모는 말씀이라는 보편의 길로 인도하되 그 자녀의 기질을 무시한 일률적 강제로 하지 않는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잠언은 격언이지 언약적 보장이 아니다. 잠언서 전체가 일반 원리의 모음이며, 욥기는 바로 그 일반 원리의 예외를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 신실한 양육이 일반적으로 맺는 열매를 진술한 것이지, 자녀의 구원을 부모의 행위에 묶은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을 보장으로 읽는 순간, 신실한 부모가 자녀를 잃었을 때 부모는 자기를 정죄하고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훈계의 모범은 하나님 자신이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 히브리서 12:5-11

여기에 부모가 따라야 할 훈계의 모형이 있다. 세 가지가 동시에 성립한다. 동기는 사랑이다(6절). 목적은 우리의 유익이다(10절). 결과는 의의 평강한 열매다(11절).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인간의 분풀이지 하나님을 본받는 양육이 아니다.

10절의 한 구절이 결정적이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본문은 인간 부모의 훈계가 자기 뜻대로 행해질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다. 부모의 훈계는 항상 부모 자신의 죄에 오염될 위험을 지닌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기 훈계가 정당한지를 자기 감정이 아니라 이 세 기준 — 사랑·자녀의 유익·평강의 열매 — 으로 점검해야 한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II.viii.36-38에서 5계명을 다루며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부모의 권위는 자기가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임하셨기 때문에 성립한다. 따라서 훈계의 목표는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하나님께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구별이 무너지면 훈계는 부모의 자기 만족이 되고, 자녀는 부모를 두려워하되 하나님은 모르는 인간이 된다.

자녀의 마음 이전에 부모의 마음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신명기 6:6-7

셰마의 순서가 결정적이다. 자녀의 마음에 새기기 전에 부모 자신의 마음에 먼저 새겨져야 한다. 자기 마음에 없는 말씀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이 한국 가정 신앙 교육의 가장 큰 실패다. 부모가 본을 보이지 않는 신앙은 자녀에게 위선의 종교로 학습된다.

이 사실은 부모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한다. 자녀의 신앙을 빚어야 한다는 부담이 부모를 강박으로 몰 때, 셰마는 먼저 네 자신을 빚으라고 말한다. 부모가 매일 말씀 앞에 자기를 새기는 그 자리가 바로 가정 영성의 일차 자리다.

잘못된 훈계 다섯 가지

한국 가정에서 가장 흔한 잘못된 훈계 다섯 가지를 짚는다.

  1. 분노로 행하는 훈계 — 자녀의 행동이 아니라 부모의 감정에 반응한다. 같은 잘못이 부모가 평온할 땐 넘어가고 피곤할 땐 폭발한다.
  2. 일관성 없는 훈계 — 같은 행동에 어제는 매를 들고 오늘은 웃는다. 자녀가 학습하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부모의 기분 읽기다.
  3. 비교에 의한 훈계 — “옆집 누구는 잘하던데.” 자녀의 영혼에 평생 가는 열등감을 새긴다.
  4. 영적 협박 — “기도 안 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 하나님을 자녀의 양심을 통제하는 도구로 삼는 우상숭배다.
  5. 칭찬 결락 — 잘못만 지적하고 잘한 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자녀는 나는 영원히 부족하다는 자기 인식을 형성한다.

올바른 훈계의 네 기둥

히브리서 12장과 셰마 위에 세워지는 훈계는 네 기둥을 갖는다.

  • 일관성 — 같은 행동에 같은 반응. 자녀가 부모의 기분이 아니라 행동의 결과를 학습하게 한다.
  • 설명 — 왜 안 되는지를 자녀의 양심에 호소한다. 이성적 권면이 nouthesia의 핵심이다.
  • 회개의 길 — 잘못 후 돌이킬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둔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않는다.
  • 회복의 안아줌 — 훈계 후 반드시 사랑의 확인이 따라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그러하시듯.

부모는 길을 닦을 뿐, 바람은 성령이 부신다

자녀의 영혼은 부모의 산물이 아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요한복음 3:8

중생은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다. 부모가 자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부모는 자기 영혼을 망친다. 성공하면 자부하고 실패하면 자책하는 끝없는 시계추가 된다. 부모는 길을 닦을 뿐, 그 길을 걷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진리가 가장 분명히 증명된 자리가 모니카의 30년이다. 모니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30년을 기도했다. 그 30년 동안 모니카가 한 일은 강요도 협박도 아니었다 — 기도와 본이었다. 그 본이 30년 후에 열매를 맺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에 “나는 어머니의 눈물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했다. 매튜 헨리의 가정도 마찬가지다. 매일의 가정 예배가 그의 신학의 토대를 빚었다.

한 세대를 넘어가는 신앙

1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4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 시편 78:1, 4, 6-7

이 시편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려주라고 명한다. 가정 영성의 핵심은 교리 암송이 아니라 간증이다. 부모가 자기 인생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하셨는지를 자녀 앞에서 거듭 말할 때, 자녀는 그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받을 수 있는 마음의 토양을 얻는다.

회개하는 부모가 가르치는 복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한국 부모가 회복해야 할 한 능력이 있다. 자녀에게 사과하는 능력이다. 잘못한 훈계 후에 “엄마가 분노로 그랬다,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 이 한 문장이 가정의 신학을 바꾼다.

자녀는 완전한 부모가 아니라 회개하는 부모에게서 복음을 배운다. 회개하는 부모를 본 자녀는 평생 회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기 신앙의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훈계와 사랑이 한 호흡으로 묶이는 자리다 — 부모도 자녀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

훈계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한 형태이며, 사랑은 훈계 없이 자랄 수 없다. 본문은 둘을 분리한 적이 없다. 분리한 것은 우리의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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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