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혜로운 자의 가장 어리석은 선택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혜를 받은 사람이다. 열왕기상 3장에서 그는 “듣는 마음”을 구했고, 하나님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지혜를 주셨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 열왕기상 11:4
“마음이 온전하지 않았으므로.” 성경은 솔로몬이 어느 날 갑자기 우상숭배자가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점진적이었다.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마음이 기울고, 산당을 세웠다. 한 걸음씩, 매우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식이 우상숭배로부터 면역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솔로몬이 증명한 가장 불편한 교훈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이 기우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솔로몬은 잠언을 기록하면서 스스로 잠언이 경고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갔다. 신앙은 자동으로 전수되지 않으며, 지혜도 자동으로 순종을 보장하지 않는다.
정치가 신학을 만들 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폭정으로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은 심각한 정치적 고민에 빠진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 마음이 다윗 왕조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설계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 열왕기상 12:28
이 구절을 읽을 때 전율이 흐르는 이유가 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 이것은 출애굽기 32:4의 아론이 한 말과 거의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그 반복의 주체였다.
여로보암이 한 일의 본질은 이것이다: 기존 신앙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내용을 바꾼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 출애굽의 역사, 제사의 형식을 모두 유지하면서, 장소를 바꾸고, 제사장 자격을 바꾸고, 절기를 바꾸었다. 겉은 같고 속이 다른 종교 — 이것이 가장 분별하기 어려운 우상숭배의 형태다. 정치적 계산이 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갈멜산에서의 대결
여로보암의 체제가 200년 가까이 이어진 후, 아합 왕의 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이 가져온 것은 단순한 또 하나의 신이 아니었다. 국가 종교 자체를 바알로 교체하려는 체계적 시도였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학살당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이 땅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그 한복판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 섰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 열왕기상 18:21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침묵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들은 선택할 수 없었다. 아니, 선택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 — 여호와도 버리지 않고, 바알도 버리지 않는 것 — 이것이 모든 시대 혼합주의의 본질이다.
엘리야는 기적을 행하기 전에, 먼저 무너진 제단을 쌓았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 열왕기상 18:30-31
무너진 제단의 수축. 이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언약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행위였다. 엘리야는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예배의 기초를 먼저 놓았다. 기적 전에 예배가, 능력 전에 회복이 먼저다.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렸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그것을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 열왕기상 18:38-39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이 고백은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불이 강제로 드러낸 것이다.
성전 안의 바알 — 창조 질서의 역전
아합 이후에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절정은 남유다의 므낫세 왕에게서 나타난다.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 역대하 33:6
자녀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 이것은 창조 질서의 극단적 역전이다.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창조의 원리인데, 그 자녀를 신에게 태워 바친다. 우상숭배는 결코 “개인적 종교 취향”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무죄한 피가 흐르는 곳에는 언제나 거짓 신이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므낫세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역대하 33장은 그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회개했다고 기록한다. 55년 동안 우상숭배를 주도한 자도, 겸비하여 돌아올 때 용서받았다. 이것은 은혜의 깊이가 죄의 깊이보다 깊다는 증거다.
헛것을 따른 자들은 헛것이 되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하나님이 200년 이상 인내하신 끝에 내린 심판이었다. 열왕기하 17장은 그 멸망의 원인을 길게 열거하는데, 그 핵심은 이 한 구절에 담겨 있다.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 열왕기하 17:15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며.” 히브리어 원문에서 ‘헛된 것’(hebel)이 반복된다.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다”의 그 단어다. 예배의 대상이 예배하는 자를 형성한다는 시편 115편의 원리가 국가적 규모로 실현된 것이다. 헛것을 따르면, 사람도 헛것이 된다. 공허한 것을 섬기면, 삶도 공허해진다.
우상의 수도에서 우상의 허무를 보다
남유다마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후, 이스라엘은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우상숭배 때문에 포로가 되었는데, 그 포로지가 온 세상의 우상이 모여 있는 바빌론이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이사야는 우상의 어리석음을 가장 날카롭게 폭로한다.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 이사야 44:17
나무 반은 불을 피우고, 나무 반은 신을 만든다. 같은 재료, 같은 나무다. 한쪽은 태워서 고기를 굽는 연료이고, 다른 쪽은 엎드려 “나를 구원하라”고 기도하는 대상이다. 이사야는 묻는다 — 이것이 합리적인가? 그런데 우상숭배자는 이 모순을 보지 못한다.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로기의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상의 수도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가장 친밀한 위로를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이사야 41:10
성전이 무너지고, 왕이 사라지고, 땅을 잃은 상태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금송아지가 줄 수 없었던 것, 바알이 약속하지 못했던 것, 모든 우상이 실패한 그것 — 임재 — 을 하나님만이 주신다.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 앞에 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본 자는 금 신상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 참된 것을 본 눈에는 거짓된 것이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 모든 역사가 향하는 곳
구약의 우상숭배 역사를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누가 인간의 마음을 바꿀 것인가?
율법은 “하지 말라”고 명했다. 선지자들은 “돌아오라”고 외쳤다. 사사들은 잠시 구원했고, 왕들은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었다. 외부의 징계도, 기적도, 포로의 고통도 인간의 마음을 영구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것을 약속하셨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에스겔 36:25-26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 이것은 외부적 교정이 아니라 내면의 근본적 변환에 대한 약속이다. 우상 제조 공장 자체를 해체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 모든 역사를 요약하는 한 구절로 수렴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이사야 53:6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사사기의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와 같은 말이다.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고, 바알 앞에서 무릎 꿇고,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고, 각기 자기 길로 간 모든 역사가 —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구약 우상숭배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침내 스스로 우상이 파괴한 모든 것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 안에서 완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