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교회를 다녀야 하나요 — 평생?

언제까지 교회를 다녀야 하나요 — 평생?

#새신자#교회론#비교종교

솔직한 질문 하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이 스친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지? 평생?

일요일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예배를 드리고, 모임에 참석하고. 처음엔 새로운 마음으로 다녔지만, 몇 달이 지나면 슬슬 피로가 온다. 종교라는 것이 결국 끝없는 의무의 연쇄가 아닌가 하는 의심. 이 의심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놀라운 것이 드러난다. “언제까지 가야 하나?”라는 질문 자체가 하나의 진단서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한 가지 구조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살펴보면, 예배 참여에 관해 놀랍도록 비슷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천주교는 주일 미사 참석을 의무로 규정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미사에 불참하면 대죄(peccatum mortale)에 해당하며,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천주교는 이를 성사적 은혜의 통로로 이해하지만, 개혁주의 관점에서 보면 은혜가 제도적 참여에 종속되는 구조가 된다. 참석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죄를 지우려면 또 다른 종교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슬람에서 하루 다섯 번의 예배(살라트)는 다섯 기둥 중 하나다. 이것은 알라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표시이며, 신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행위다.

불교에서 절이나 법회에 참석하는 것은 — 적어도 한국 불교의 대중적 실천에서 — 공덕을 쌓는 과정이다. 참여 자체가 영적 자산을 축적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이 세 종교의 구조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신 앞에 설 자격을 만든다. 출석이 곧 자격이고, 불참이 곧 결격이다. 이 구조 안에서 “언제까지 가야 하나?”라는 질문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끝이 없는 의무는 누구에게나 피로하니까.

그런데 만약 기독교가 이 구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복음은 이 구조를 뒤집는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모든 종교적 의무 구조를 뒤집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교회에 나간다는 뜻이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다.

천주교의 미사 의무, 이슬람의 살라트, 불교의 법회 참석은 모두 “해야 자격이 생긴다”는 방향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자격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셨다. 당신이 교회에 가는 것은 자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이다.

이 차이는 미묘해 보이지만, 실은 하늘과 땅만큼 크다. 하나는 채무자의 발걸음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자의 발걸음이다.


”사모하다” — 참된 성도의 언어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시편 27:4

여기서 다윗이 쓰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사모하다.” 의무가 아니다. 규정도 아니다. 평생 거기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누가 어머니 품에 안기는 것을 “의무”라 부르겠는가?

초대교회부터 이어진 전통으로, 칼뱅도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어머니”(Mater Ecclesia)라 불렀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교회는 아이가 돌아가야 할 의무를 지는 기관이 아니라, 아이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품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교회에 가야 하나?”라는 질문은 정직하다. 그러나 이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면, 그것은 하나의 영적 증상이다. 아프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복음이 영혼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신호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이 구절은 흔히 “교회 빠지지 마라”는 출석 규정으로 읽힌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보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가 먼저 나온다. 모이는 이유는 출석 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종말론적 기대를 담고 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함께 모여 서로를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갈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아직 가고 싶지 않은가?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

이 질문 앞에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이미 이 상태를 알고 있으며, 그 해답도 제시한다.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 같은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에스겔 36:26-27

돌같이 굳은 마음 — 의무감에 짓눌려 무감각해진 마음, 교회가 짐으로 느껴지는 마음. 그것을 부드러운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것은 인간의 결심이나 의지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면 — 신학에서 이것을 중생(重生, regeneratio)이라 부른다 —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을 향한 자연스러운 갈망이 생긴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본능적으로 찾듯, 새로 태어난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끌린다.


”가야 한다”에서 “가고 싶다”로

정리하면 이렇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가야 한다”를 말한다. 가지 않으면 죄가 되고, 자격을 잃고, 공덕이 줄어든다. 그 구조 안에서 “언제까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끝없는 의무는 반드시 피로를 낳으니까.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교회 출석은 그 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교회는 은혜를 맛본 사람이 더 맛보고 싶어서, 같은 은혜를 받은 형제자매와 함께하고 싶어서, 다시 오실 주님을 함께 기다리고 싶어서 모이는 곳이다.

그러니 만약 지금 교회가 짐처럼 느껴진다면, 자신을 탓하지 말라. 대신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꿔 주십시오.” 에스겔의 약속대로,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시는 분이 계시다.

교회를 평생 다녀야 하느냐고? 복음이 당신의 마음 깊이 뿌리내리는 날, 그 질문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다윗의 고백뿐이다 —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