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고백 하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찬양도 부르고, 기도도 해본다. 그런데 가슴 한편에 이런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나는 정말 믿는 걸까?”
옆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저 사람처럼 뜨겁지 않은 나는 믿는 게 아닌 건가. 100퍼센트 확신이 없으면 가짜 신자인 건가. 의심이 드는 순간마다 “나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오해 — 믿음은 의심 없는 확신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의심 제로의 상태로 생각한다. 마치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야 합격하는 것처럼, 확신이 완벽해야 “믿는 사람”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성경에는 놀라운 장면이 하나 있다. 아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한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벽한 신앙고백이 아니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 마가복음 9:23-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 문장 안에는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아버지를 꾸짖지 않으셨다. 돌려보내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아이를 고쳐 주셨다.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진실이 있다. 의심을 가지고도 주님께 나아오는 것, 그것이 이미 믿음이다.
진실 — 믿음의 능력은 크기에 있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마태복음 17:20
겨자씨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었다. 예수님은 일부러 가장 작은 것을 골라 말씀하셨다. 왜일까?
믿음의 능력은 씨앗의 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은 그 씨앗이 심긴 땅, 곧 그리스도에게 있다. 작은 손이라도 밧줄을 잡으면 빠지지 않는다. 밧줄의 힘은 손의 크기가 아니라 밧줄 자체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내 믿음이 너무 작은데”라는 걱정은, 사실 질문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이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내 믿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감정은 온도계, 약속은 닻
새신자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것 중 하나가 감정의 파도다. 어떤 날은 은혜가 충만한 것 같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감정이 식었으니 믿음도 식은 것”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내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8
바다 위의 배를 생각해 보라. 파도는 매 순간 출렁인다. 어떤 날은 잔잔하고 어떤 날은 거칠다. 그러나 닻이 바닥에 박혀 있으면, 파도가 아무리 심해도 배는 떠내려가지 않는다.
감정은 파도다. 출렁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속은 닻이다.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분의 약속이 바닥에 박혀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감정이 흔들리는 날에도.
가장 솔직하고 아름다운 기도
혹시 지금 이런 마음이라면, 성경이 알려주는 기도가 하나 있다. 이천 년 전 한 아버지가 눈물로 외쳤던 바로 그 기도다.
“주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보다 더 솔직한 기도가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기도가 있을까. 이 기도를 드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떨리는 손으로라도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어도 괜찮다. 확신이 100퍼센트가 아니어도 괜찮다. 믿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가는 방향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겨자씨만 한 믿음도 산을 옮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