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용어 사전 1부: 하나님을 말하는 단어들

교회 용어 사전 1부: 하나님을 말하는 단어들

#새신자#교회용어#은혜#영광#거룩#섭리

외국어 같은 한국어

교회에 처음 간 날, 나는 분명 한국에 있었는데 외국에 온 것 같았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은혜? 누구한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영광이 물건인가, 어떻게 돌리지?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다는 게 정확히 뭔데? “섭리 가운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섭리? 그건 운명이랑 뭐가 다르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쓰고 있었다. 마치 비밀 언어를 모르면 이 공동체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비밀 언어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릇의 모양을 알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가 보인다.


은혜 — “감동받았다”가 아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이다. “오늘 설교 은혜 받았어요.” “은혜가 넘칩니다.” 이 말을 자주 듣다 보면, 은혜란 감동적인 기분 —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을 뜻하는 것 같다. 설교를 듣고 아무 감정이 없으면 “오늘은 은혜를 못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은혜가 감정이라면,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법정에 섰다. 판결은 명확하다 — 전 재산을 내놓아도 모자란다. 그런데 판사가 망치를 내리기 전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 돈으로 그 빚을 전부 갚아버렸다. 빚진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눈물이 나든 안 나든, 빚은 사라졌다.

그것이 은혜다. 내가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어진 것이다. 감동은 은혜를 깨달은 후에 따라올 수 있는 반응이지, 은혜 자체가 아니다.


영광 — 칭찬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수상 소감에서도 듣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영광은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일에만 영광을 돌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영광이라는 단어는 사라진다.

그런데 영광의 히브리어 원어 카보드 (כָּבוֹד) 는 ‘무게’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 존재 자체의 무게가 드러나는 것이다. 가벼운 칭찬이 아니라, 압도적인 실재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시편 19:1

태양은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야 빛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냥 빛난다. 빛나는 것이 태양의 존재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그 빛이 우리를 통해서도 반사되도록 사는 것 — 거울이 빛의 근원을 가리키지 않고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영광은 좋은 날에만 돌리는 감사 인사가 아니다. 실패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선하시다고 신뢰하는 것, 그 신뢰를 통해 하나님의 무게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영광이다.


거룩 — 도덕 목록이 아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목록이 떠오른다. 술 마시면 안 되고, 욕하면 안 되고, 나쁜 영상 보면 안 되고… 거룩이란 결국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목록을 잘 지키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술과 담배를 끊었는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탐욕과 교만이 들끓는다면, 그 사람은 거룩한가?

거룩의 히브리어 카도쉬 (קָדוֹשׁ) 는 ‘구별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와 근본적으로 다르시다는 선언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레위기 11:4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베드로전서 1:15

거룩은 밖에서 안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물이 끓는 이유는 밖에서 냄비를 아무리 닦아도 설명되지 않는다 — 불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거룩은 성령의 불이 안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기다. “하면 안 된다”가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출발점이다. 구별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도 구별되어 간다.


섭리 — 운명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말이 때로는 위로처럼, 때로는 체념처럼 들린다. 결국 섭리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기도는 왜 하고, 노력은 왜 하는가?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운명은 인격이 없다. 팔자는 아무 목적 없이 정해진 레일이다. 기차는 그 위에서 그냥 달릴 뿐이다 —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섭리는 다르다. 섭리는 인격적인 아버지가 목적을 가지고 이끄시는 통치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28

운명이 강물에 떨어진 나뭇잎이라면, 섭리는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다. 아이가 넘어질 때도, 길이 험할 때도, 때로는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우회로를 갈 때도 — 아버지는 알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 길을 가는지. 그리고 그 손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섭리를 믿는 사람은 체념하지 않는다. 고난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레일 위의 나뭇잎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곳

은혜, 영광, 거룩, 섭리. 이 네 단어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자격 없는 자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 존재의 무게로 온 세상을 채우시는 분.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신 분. 인격적으로 우리의 손을 잡고 걸으시는 분.

이 단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 그것을 말하는 단어들이 있다. 칭의, 성화, 구속, 회개. 이 단어들은 더 낯설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안 다음에야 비로소 이 단어들이 열린다. 그리고 열리는 순간, 교회에서 듣는 모든 말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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