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이렇게 썩었는데, 왜 믿으라는 건가요?

교회가 이렇게 썩었는데, 왜 믿으라는 건가요?

#교회론#한국교회#교회 부패#보이는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변증

뉴스를 보고 나면

목사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수백억 원의 교회 재정이 개인 계좌로 빠져나갔다. 담임목사가 성범죄로 기소되었는데, 신도들이 오히려 피해자를 내쫓았다. 대형 교회 앞에 최신형 외제차가 줄지어 서 있고, 그 교회 근처 골목에는 폐지를 줍는 노인이 지나간다.

이런 뉴스를 보고 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온다.

교회가 이렇게 썩었는데, 왜 믿으라는 건가요?

이 질문은 정당하다. 분노도 정당하다.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질문 안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다 — 교회와 기독교가 같은 것이라는 전제다. 교회가 썩었으니 기독교도 거짓이라는 논리다.

이 전제가 맞는지, 천천히 살펴보자.


네 가지 구조적 문제를 직면하자

먼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한국 교회의 부패는 “일부 타락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다. 적어도 네 가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교회 정치의 붕괴. 개혁주의 장로교는 원래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당회(장로회의), 노회(지역 교회 연합), 총회(전국 대표 기구)라는 복수 치리 구조가 서로를 견제한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교회는 이 구조를 사실상 폐기하고, 담임목사 1인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다. 권력을 집중시키면 반드시 부패한다 — 이것은 신학 이전에 상식이다.

둘째, 재정 불투명. 교회 재정이 공개되지 않는 곳이 아직도 많다. 헌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성도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신앙의 문제 이전에 신뢰의 문제다.

셋째, 세습. 교회는 가업이 아니다. 목사직은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부름 받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넷째, 권위주의.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 뒤에 숨어 비판을 차단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성도를 “불신앙”으로 매도하는 문화. 이것은 성경적 권위가 아니라 인간적 지배욕이다.

이 네 가지 문제를 “일부의 일탈”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그렇다면, 교회 = 기독교인가

여기서 결정적인 구별이 필요하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두 층위로 구분했다.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bilis)다.

보이는 교회는 우리 눈에 보이는 제도, 건물, 조직, 직분자들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운영한다. 그러므로 부패할 수 있고, 실제로 부패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절은 이것을 숨기지 않는다:

“지상의 가장 순수한 교회도 혼탁과 오류에서 면할 수 없다.”

가장 순수한 교회도. 이것은 교회가 완전하다는 자만이 아니라, 교회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다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모으신 택한 백성의 공동체다. 이 교회의 머리는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에베소서 1:22-23

부패한 목사가 이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는가? 비리를 저지르는 장로가 이 교회의 기초를 흔들 수 있는가? 아니다. 이 교회는 인간의 도덕성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선언하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6:1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부패한 목사도, 세습된 왕국도, 그 어떤 스캔들도 — 그리스도의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한다.


밀밭에는 가라지가 자란다

예수님은 이 현실을 미리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 가짜가 섞여 있다는 것을.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주인이 이르되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 마태복음 13:24-25, 29-30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예언의 성취다. 예수님은 교회가 완벽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분별은 추수 때, 즉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이 직접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교회의 부패를 보고 기독교 전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떤 논리인가? 그것은 밀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이유로 밀밭 전체를 불태우자는 논리다. 가라지가 문제라면 가라지를 지적해야 한다. 밀까지 함께 버리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위조지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 위조지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진짜 지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위조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무도 위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위선자가 있다는 것, 복음의 이름을 도용하는 자가 있다는 것 — 이것은 오히려 복음에 도용할 가치가 있다는 역설적 증거다. 진짜가 없다면 가짜도 없다.

1세기에 사도 요한은 이미 이 현상을 목격하고 이렇게 썼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요한일서 2:19

나간 자들은 원래 속하지 않았다. 부패한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신자였다가 타락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처음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적이 없는 자들이 복음의 외피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믿으라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

기독교는 목사를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교회 제도를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예수 그리스도는 세습하지 않으셨다. 재정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셨다. 권력을 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권력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의 손바닥에 있는 못 자국을 보라 — 거기에 부패가 있는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12:2

부패한 교회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부패한 의사 때문에 의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의사가 잘못했으면 의사를 바꾸어야 한다. 의학을 폐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목사가 부패했으면 그 목사를 심판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날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부패한 목자들에 대해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직접 선언하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할지라.” — 에스겔 34:10

부패한 목자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다. 우리의 역할은 그 부패에 분노하되, 분노의 방향을 잘못 겨누지 않는 것이다.


부패의 역사, 그리고 그 다음에 온 것

역사를 한 번 보자. 교회가 가장 부패했던 시대는 언제인가? 중세 말기, 면죄부를 팔고 교황이 세속 권력을 휘두르던 그 시대다. 교회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그런데 그 직후에 무엇이 왔는가?

종교개혁이 왔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존 녹스 — 이들은 교회가 썩었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가 썩었기에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사람들이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 선언은 교회가 완전하다는 자만이 아니라, 교회가 끊임없이 부패할 수 있기에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고백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독교의 포기가 아니라 교회의 개혁이다. 투명한 재정, 성경적 교회 정치의 회복, 권징의 실행, 목사 권위에 대한 성경적 견제 — 이것이 답이다.


당신의 분노가 말하는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당신이 교회의 부패에 분노하는 그 마음, 그 도덕적 직관은 어디서 왔는가? “목사가 저러면 안 된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그 기준이 순전히 인간의 합의라면, 왜 어떤 사람들은 그 부패를 정당화하는가? 만약 그 기준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왜 그 분노가 이토록 뜨거운가?

당신이 교회의 부패에 분노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안에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은 하나님의 형상이 당신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부패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교회의 썩음이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한다. 가라지를 보지 말고, 밀밭의 주인을 보라. 부패한 유리창을 보지 말고, 유리창 너머의 빛을 보라.

그 빛은 2천 년 동안 교회의 부패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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