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질문 하나
“유다서가 외경을 인용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그러면 성경도 결국 사람이 이것저것 짜깁기한 거 아닙니까?”
신학 유튜브를 접한 청년이, 혹은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누군가가 이 질문을 던진다. 질문 자체는 정직하다. 그러나 이 질문이 향하는 곳은 두 갈래다. 하나는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려 그 아래 서지 않으려는 길이다.
먼저 문제의 본문을 직접 읽자.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의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 유다서 1:14-15
이 구절은 에녹서(1 Enoch) 1:9와 거의 동일하다. 이 사실을 부정할 이유도, 회피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다.
인용은 승인이 아니다
핵심적인 혼동이 하나 있다. 어떤 문서를 인용하는 것과 그 문서 전체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이방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사도행전 17:28
또한 디도서에서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 디도서 1:12
고린도전서에서는 메난드로스의 격언을 가져왔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 고린도전서 15:33
이 인용들로 인해 아라투스의 시집이나 메난드로스의 희곡이 정경이 되었는가?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판사가 재판에서 목격자의 진술을 인용한다고 해서 목격자의 일기장 전체가 판결문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령은 기자를 통해 역사하신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성경의 영감은 어디에 임하는가? 인용된 자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기자에게 임한다. 디모데후서가 증언하는 바는 이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θεόπνευστος, 테오프뉴스토스)은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숨결로 산출되었다는 뜻이지, 기자가 참고한 모든 자료가 영감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유기적 영감론의 통찰이 빛난다. 성령께서는 유다의 인격과 문화적 기억과 문학적 언어를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해 역사하셨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에녹서는 정경은 아니었으나, 경건한 묵상의 일부로서 공동체의 신앙적 상상력 안에 살아 있던 문헌이었다. 성령께서는 유다가 이미 알고 있던 그 언어를 취하시어, 새로운 신학적 목적 아래 재배치하신 것이다. 광부가 돌무더기에서 금을 캐낼 때, 금의 가치는 돌무더기 전체가 아니라 광부의 선별에 달려 있다.
그 물의 출처는 그릇이 아니라 강이다
더 깊은 층위가 있다. 유다서 14-15절이 담고 있는 사상 — 주께서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임하시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심판하신다 — 은 에녹서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약 예언 전통의 가장 오래된 핵심 주제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리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크게 폭풍이 일리로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시되” — 시편 50:3-4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 스가랴 14:5
유다는 이 오래된 강물을 에녹서라는 그릇에서 한 모금 떠 마신 것이다. 물의 출처는 그릇이 아니라 강 자체에 있다. 유다가 인용한 내용이 에녹서에도 있다는 사실이 에녹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서 안에서 성령의 재승인을 받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명료한 선언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3항은 이렇게 고백한다.
“일반적으로 외경이라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성경 정경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어떤 권위도 가지지 않는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
에녹서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정경으로 수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경의 결정은 한 지역 교회의 관행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역사적 합의에 달려 있으며, 에녹서는 사도적 기원, 교리적 일관성, 보편적 수용이라는 정경의 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에녹서의 천사론 — 타락한 천사가 인간 여성과 혼인하여 네피림을 낳았다는 서사 — 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과 충돌한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마태복음 22:30
이 질문이 가려 하는 곳
이 논점을 미끼로 사용하는 집단들이 있다. “성경에 에녹서가 인용됐다면, 교회가 숨긴 성경이 더 있을 수도 있지 않나?”라는 논리다. 성경의 비유를 독점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종파, 절기 준수와 준경전적 문헌의 권위를 강조하는 집단 — 이들의 공통된 전략은 정경의 신뢰성을 흔들어 자신들의 추가 계시나 지도자의 권위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 질문을 품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다서의 에녹서 인용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이것은 성령의 영감이 얼마나 주권적인지를 보여준다. 성령께서는 이방 시인의 격언도, 유대 묵시문학의 전승도, 어떤 재료든 취하시어 무오한 말씀으로 봉인하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것은 인용된 자료가 아니라, 오직 성경 기자를 통해 기록된 본문이다.
태양을 보기 위해 다른 빛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은 그 자체로 신적 광채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 빛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