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생명윤리 1부: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윤리 1부: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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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을 잃은 인간은 덜 인간인가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하자. 만약 인간의 가치가 이성, 자의식,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에 있다면 —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태아는 아직 인간이 아닌가? 그 능력을 잃어버린 치매 노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가?

이 질문은 철학 교실의 사고실험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매일 내리는 결정의 바닥에 깔려 있는 전제다. OECD 최상위의 노인 자살률, 장애 자녀 출산 시 주변의 낙태 압박,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교회 안에서조차 흔들리는 목소리 — 이 모든 것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의 물음에 닿는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시리즈는 그 물음에 대한 성경적 답을 찾는다. 1부에서는 토대를 놓겠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생명윤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


형상은 부여된 것이지, 성취된 것이 아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6-27

성경이 인간에 대해 말하는 첫 번째 사실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어졌는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 이 선언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선언이다. 형상은 인간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신학적 분기점이 생긴다.

기능적 해석은 형상을 이성, 도덕 판단력, 자의식,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으로 본다. 이 해석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기능은 발달되지 않을 수 있고, 손상될 수 있고,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결론에 도달한다 — 고도의 인지 기능을 가진 침팬지가 중증 장애 신생아보다 더 큰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주장. 기능 중심의 인간관은 결국 기능을 상실한 인간의 존엄을 설명하지 못한다.

존재론적 해석은 다르다. 형상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어떤 속성(accidens)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구성 원리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를 정확히 짚었다. 형상은 인간의 본질(esse) 자체에 속하며, 인간이 인간인 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선언하신 그 순간, 형상은 인간 존재의 정의가 되었다.


타락은 형상을 훼손했으나,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에는 어떤가? 죄가 형상을 파괴하지 않았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여기서 정밀한 구분을 한다. 광의의 형상(imago Dei in sensu lato) —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근본적 사실 — 은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다. 협의의 형상(in sensu stricto) — 참된 지식, 의, 거룩함 — 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손상은 소멸이 아니다.

이 구분이 공허한 학문적 유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 타락한 인류를 향한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창세기 9:6

주목하라. 살인이 금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피해자의 지능도, 사회적 기여도, 자의식의 수준도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 범죄자와 피해자가 모두 죄인인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형상을 근거로 생명의 불가침성을 선언하신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야고보서 3: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형상은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에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왕의 동전은 진흙 속에서도 왕의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께서 데나리온 동전을 들어 물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마태복음 22:20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동전이 낡든, 흠집이 나든, 진흙에 뒤덮이든 — 형상이 새겨져 있는 한 그것은 가이사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간에게 새겨진 형상은 그가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준다. 죄로 더럽혀졌어도, 기능이 손상되었어도, 세상이 무가치하다고 판정해도 — 형상이 새겨져 있는 한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형상에는 등급이 없다. 건강한 청년의 형상이 치매 노인의 형상보다 더 선명한 것이 아니다. 대학 교수의 형상이 중증 장애인의 형상보다 더 완전한 것이 아니다. 형상은 이진법이다 — 있거나, 없거나. 그리고 인간인 한, 그것은 있다.


그리스도 — 형상의 원형이자 회복의 길

그런데 이 형상은 처음부터 한 분을 향해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골로새서 1:1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로마서 8:29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형상의 원형(archetypum)이시다. 타락이 형상을 훼손했다면, 구원은 형상의 회복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골로새서 3:10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겁다. 형상을 짓밟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회복하시려는 바로 그 형상을 인간이 기능의 잣대로 등급 매기고 폐기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실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는 기능의 척도로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존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존재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형상의 존재론적 토대가 없다면, 이 말씀은 감상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형상이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인간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이라면,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여기까지가 토대다.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부여된 것이지 성취된 것이 아니다. 타락으로 훼손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등급이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이 원리가 참이라면 —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참이라고 선언한다면 — 이 원리는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마주하기 불편한 생명에게도, 우리 사회가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는 존재에게도.

그런데 원리를 선언하는 것과 그 원리를 가장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관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형상은 존재에 속한다”는 명제가 진정으로 시험받는 자리가 있다 — 아직 숨을 쉬지 않는 생명, 아직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생명 앞에서. 그 자리에서 이 원리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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