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 힌두교 비인격적 절대자와 기독교의 인격신

우주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 힌두교 비인격적 절대자와 기독교의 인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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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아니?”

한 청년이 찾아와 고백했다. “명상 앱을 쓰는데, 우주와 하나 되는 순간이 와요. 기도보다 더 깊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짧게 물었다. “그 우주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아니?” 청년은 답하지 못했다. 그가 합일을 경험했다고 느낀 그 대상은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요가, 마음 챙김 앱, “좋은 에너지를 우주로 보내라”는 SNS 언어, 크리스털·오라·차크라 — 이 언어의 뿌리는 인도 대륙의 한 개념, 브라흐만(Brahman)에 닿는다.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자 — 정직한 이해

가장 정교한 힌두 체계는 8세기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불이일원론)다. 절대자는 두 얼굴이다.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속성도 형상도 관계도 없는 순수 의식이며, neti neti(“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언어만 허용된다. 사구나 브라흐만은 비슈누·시바 같은 속성 있는 신들이지만, 아드바이타 안에서는 “낮은 단계의 유용한 표현”일 뿐이다. Tat Tvam Asi(“그대가 그것이다”) — 분리감은 환영이고, 해방(모크샤)이란 개별 자아가 브라흐만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 구조는 장엄하다. 무한자를 유한 속성에 가두지 않으려는 부정 신학의 열정이 있다. 개혁주의는 이것을 일반은혜의 흔적, 인간 안에 남은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으로 정직하게 인정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20

그러나 로마서 1장은 바로 뒤이어 경고한다. 이 씨앗은 타락한 인간 안에서 반드시 왜곡된다고. 장엄한 부정 신학도 그 장엄함 안에서 결정적인 한 가지를 잃어버린다.

비인격에서 인격이 나올 수 없다

아드바이타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인식도 의지도 관계도 없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어떻게 인격을 가진 존재가 출현하는가? 더 작은 것은 더 큰 것을 산출할 수 없다. 인식 없는 것에서 인식이, 사랑 없는 것에서 사랑이 저절로 솟아날 수 없다.

아드바이타는 이 난제를 마야(māyā)로 처리한다. 인격성은 환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이름을 바꾼 것일 뿐이다. 환영이 발생한다면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가 이미 있어야 한다. 꿈꾸는 ‘나’는 꿈이 아니어야 한다. 기독교의 답은 단순하다. 인간이 인격인 이유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영원 전부터 관계 안에 계신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홀로 절대자이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하신 분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요한복음 17:24

창세 전부터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셨고, 성령은 그 사랑의 끈(vinculum amoris)이셨다. 요한은 이 진리를 압축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이는 감정 하나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본질 안에 이미 사랑하는 자·사랑받는 자·사랑 자체의 구조가 내재한다는 뜻이다. 단일 인격의 절대자였다면 창조 이전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시다.

브라흐만은 영원 전부터 홀로다. 홀로이기에 관계가 없고, 관계가 없기에 사랑이 없으며, 사랑이 없기에 부를 이름이 없다. 광대함과 인격성은 모순이 아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1절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뜻하시고,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다.

말하지 않는 신은 구원하지 않는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1권 6장에서 말했다. “성경의 안경 없이는 하나님께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자연의 흔적은 신성을 어렴풋이 비칠 뿐, 그분의 인격(persona)을 드러내지 못한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창 1:3),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마침내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되셨다(요 1:14). 브라흐만은 말하지 않는다. 입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건넬 상대가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름으로 부르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이사야 43:1

인격이 없는 절대자는 말을 걸 수 없고, 말을 걸 수 없는 존재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할 수 없는 존재는 십자가로 오지 않는다. 우주의 에너지는 골고다에 달리지 않는다. 아드바이타의 해방은 개체 의식이 우주 의식에 흡수되는 것이다. 강이 바다에 이르러 사라지듯 개인은 사라진다. 반면 기독교의 구원은 인격의 소멸이 아니라 회복과 완성이다. 은혜는 자연을 폐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요한계시록이 약속하는 것은 개별성의 소거가 아니라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이다(계 2:17).

한국 교회 안으로 스며든 브라흐만

브라흐만 영성은 부드러운 얼굴로 이미 교회 문턱을 넘었다.

  • “기도할 때 머리를 비워야 해요.” — 성경적 기도는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비움의 기술’이 아니라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 “느낌이 중요해요, 교리는 나중이에요.” — 느낌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면, 우리는 자기 내면을 숭배하게 된다.
  • “내 안의 신성한 빛을 발견해야 해요.” — 이것은 아드바이타의 Aham Brahmasmi(“나는 브라흐만이다”)를 한국어로 번역한 문장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하되,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신다

브라흐만이라는 장엄한 이름 아래에서도, 뉴에이지의 우주라는 세련된 언어 아래에서도, 인간은 결국 한 가지를 피하려 한다.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시는 인격적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분 앞에 서면 우리는 환영으로 사라질 수 없다. 오히려 이름이 불리고, 죄가 드러나고, 정확히 그 자리에서 십자가가 나타난다.

우주 에너지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고,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신다. 창세 전부터 성자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지금 너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모든 합일의 환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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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