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요?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물이 얼음도 되고, 수증기도 되잖아요. 하나님도 그런 거예요.”
교회 소그룹에서, 전도 현장에서, 심지어 강단에서도 이 비유는 반복된다. 직관적이고, 단순하며, 유일신 신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한 분 하나님이 때에 따라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설명.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모든 것이 문제다.
아리우스의 정반대, 그러나 같은 파괴력
1부에서 우리는 아리우스주의를 다루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너무 낮추는” 오류를 범했다. 성자를 피조물로 격하시킨 것이다. 양태론은 그 정반대 방향에서 삼위일체를 무너뜨린다. 세 위격을 합쳐버리는 것이다. 방향은 반대지만, 도착지는 같다. 복음의 파괴다.
3세기 로마의 사벨리우스가 체계화한 이 오류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구약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 시대에는 성자로, 교회 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세 위격이 아니라, 한 분의 세 가지 “양태(mode)”, 즉 역할이라는 것이다.
양태론은 이미 3세기 중반 여러 교회회의에서 정죄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삼위일체 고백이 이 오류를 더욱 분명히 배제하였다. 교회는 거의 2,000년 동안 이 오류를 경계해 왔다. 그런데 오늘날, 이 오래된 이단은 새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주장하는 집단, 구약은 성부의 시대, 신약은 성자의 시대, 오순절 이후는 성령의 시대라고 가르치는 단일신론 운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양태론적 표현들이 있다.
“성부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오늘날은 성령으로 나타나십니다.” “삼위일체란, 한 하나님이 세 가지 역할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설교자 본인은 정통 삼위일체를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단에서 나온 말은, 글자 그대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이다.
물/얼음/수증기 — 왜 이 비유가 치명적인가
이 비유의 문제는 단순하다. H₂O는 동시에 세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은 얼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얼음이 수증기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시며, 서로 관계하시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보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3:16-17
성자가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며, 성부가 하늘에서 말씀하신다. 세 위격이 동시에, 각각 구별되어 존재하신다. 한 분이 역할을 바꿔가며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양태론은 이 장면을 설명할 수 없다. 한 배우가 세 역할을 동시에 연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태복음 26:39
“나의 원”과 “아버지의 원”이 구별된다. 양태론이 옳다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시며 자기의 뜻과 다른 자기의 뜻에 복종하신 것이 된다. 이것은 성경의 서사가 아니라 연극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연기를 하신 것이라면, 계시(revelation) 자체가 허구가 된다.
양태론은 왜 복음을 파괴하는가
양태론의 해악은 단순한 신학적 부정확성에 그치지 않는다. 복음의 구조 자체가 무너진다.
첫째, 대리 속죄가 불가능해진다. 성부와 성자가 같은 분의 다른 역할이라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부과한 것이 된다. 다른 분이 대신 담당하셨다는 대리(substitution)의 의미가 사라진다. 더 나아가 성부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 내준 자기 사랑으로 전락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로마서 8:32
둘째, 중보자가 존재할 수 없다. 중보자는 두 당사자 사이에 서는 자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 인격이라면, 중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셋째,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사라진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요한복음 17:24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 영원 속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사랑이 있었다. 양태론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한 분이 역할을 나누기 전에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피조물을 필요로 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성(aseity)을 파괴한다.
넷째, 구원의 경륜이 붕괴된다. 에베소서 1장은 구원을 삼위의 협력으로 묘사한다. 성부가 선택하시고(4-5절), 성자가 피로 속량하시며(7절), 성령이 인치신다(13-14절). 이것은 한 분이 순차적으로 세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세 위격이 각자의 고유한 사역을 통해 하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다. 양태론은 이 풍성한 구원의 드라마를 독백극으로 축소한다.
삼위일체를 바르게 고백한다는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의 통일성 안에, 한 본질, 한 능력, 한 영원성을 가진 세 위(位, Persons)가 계시는바,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본질(essentia)에 있어서 하나, 위격(persona)에 있어서 셋.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쉬운” 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으니 단순화하자”는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지적 용량에 맞추어 재단하게 된다. 그 재단된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물/얼음/수증기 비유를 내려놓으라. 대신 성경 자체를 보라. 요단강에서 세 위격이 동시에 계시되는 장면을, 겟세마네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장면을, 오순절에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신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보라. 성경은 삼위일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보여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한복음 14:10
서로 안에 거하시면서도 구별되시는 세 위격. 이것은 양태로는 불가능한 관계다. 한 양태가 자기 자신 안에 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신비이되 모순이 아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시되, 성경의 증거 위에 견고히 서 있는 진리다.
그런데 교회사의 이단들은 삼위일체만 공격한 것이 아니다. 아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고, 양태론이 세 위격을 합쳐버렸다면, 세 번째 적은 더 교묘한 곳에서 왔다. 성경 밖의 “비밀 지식”을 들고, 이 세상 자체가 악하다고 선언하며, 구원을 영혼의 탈출로 재정의한 사상. 그것은 기독교를 입으로는 고백하면서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종교로 바꾸어 놓았다. 다음 편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