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수 없는 날에도 감사하라는 말의 진짜 뜻

감사할 수 없는 날에도 감사하라는 말의 진짜 뜻

#감사#섭리#고난#데살로니가전서#신앙생활

“감사하세요”가 가장 잔인하게 들리는 순간

당신이 지금 밤마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혹은 아침이 오는 것 자체가 두려운 날들을 지나고 있다면, 누군가 다가와 “그래도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내 고통이 부정당하는 느낌, 내 눈물이 믿음 없음의 증거로 취급당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감사하면 복 받는다”는 말은 더했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감사라는 동전을 넣어야 복이라는 음료를 뱉어내는 자판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는가.

이 글은 그 상처받은 마음에 말을 걸고 싶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명령이 정말로 당신의 고통을 무시하는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오랫동안 그 말을 잘못 들어온 것인지.


”범사에 감사하라”는 억지 긍정이 아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18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에서 “범사에”로 번역된 ἐν παντί(엔 판티)는 “모든 것에 대하여(for everything)가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in everything)를 뜻한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바울은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좋은 일이니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질병이 좋은 것이라거나, 상실이 축복이라거나, 배신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이것이다 — 어떤 상황 속에 있든, 그 상황 한가운데서도 감사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사의 근거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구절이 바로 그 근거를 가리킨다. 감사의 토대는 내 형편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다. 형편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신분은 무너지지 않는다.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고백이다

우리가 “감사”를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감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을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감정 이전에 고백이다. 선언이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신앙의 언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1권 17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는 번영 속에서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기에 인내한다. 섭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내 형편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 때도 붙드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 제13조는 이렇게 고백한다 — “나뭇잎 하나도 하나님의 뜻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고통의 날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지 않다. 이것은 고통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부재하지 않으시다는 것, 그분의 선하심이 완전히 거두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해가 뜨고, 오늘도 숨을 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길이다. 고통 한가운데서도 그 손길이 완전히 거두어졌는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인식 자체가 감사의 신학적 뿌리다.


성경이 보여주는 감사 — 그것은 바닥에서 나왔다

성경에서 가장 깊은 감사는 언제나 가장 깊은 고통에서 나왔다.

욥 — 모든 것을 잃고도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 욥기 1:21

욥은 하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 종, 자녀 — 전부.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렸다. 이것은 극심한 애통의 표현이다. 욥은 울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고통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 엎드림 속에서, 울부짖는 그 한복판에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알았기에 고백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이것은 억지 긍정인가? 아니다. 이것은 파산한 자가 유일하게 남은 것을 붙드는 행위다.

하박국 — “없다, 없다, 없다” 그러고도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 하박국 3:17-18

무화과 — 없다. 포도 — 없다. 감람 — 없다. 먹을 것 — 없다. 양 — 없다. 소 — 없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완전한 파산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럼에도”라고 말한다. 감사의 근거가 형편에 있었다면 하박국은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환경이 바닥을 쳤을 때, 비로소 바닥이 아닌 곳에 발을 딛는 믿음이 드러난다. 하나님 자신이 발판이 될 때, 모든 것이 무너져도 서 있을 수 있다.

바울과 실라 — 감옥 바닥에서 부른 찬송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사도행전 16:25

매질을 당하고, 발이 착고에 채워진 채, 빌립보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 그들은 찬송했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다. 석방이 확실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신분이, 감옥의 착고보다 더 확실했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에서 하나님 응시로 — 감사가 영혼의 방향을 바꾼다

시편 42편의 기자는 깊은 절망 속에 있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5

여기서 시편 기자가 하는 일을 주목하라. 그는 자기 영혼에게 끌려다니지 않는다.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건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다.

고통 속에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말을 너무 많이 듣는 것이다. 감정이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다 끝났다.” “회복은 불가능하다.” 감정은 이렇게 속삭인다. 그러나 감정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듣기를 멈추고 말하기 시작한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것이 감사의 본질이다. 감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 위에 의지를 정박시키는 행위다.

이것이 감사가 영혼의 방향을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자기 연민은 나의 상실을 전경에 놓고 하나님을 배경으로 밀어낸다. 감사는 그 순서를 뒤집는다. 하나님을 전경에 놓고, 내 상황을 — 부정하지 않되 — 그분의 주권 아래에 둔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묻고 답한다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나는 몸도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소유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한, 감사의 뿌리는 마르지 않는다.


감사할 수 없는 날,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법

여기까지 읽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돌처럼 무거울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감사는 감정이 동의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정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입술로 고백하는 것 — 그것이 가장 고귀한 영적 전투다.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감사 일기를 쓰되, “오늘 좋은 일”을 적지 말라. 대신 “오늘 하나님이 신실하셨던 증거”를 적으라. 좋은 일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셨던 날은 없다. 오늘도 숨이 붙어 있다면, 그것이 첫 번째 증거다.

그리고 만약 그 한 줄조차 적을 수 없다면, 이 한 문장을 빌려 써도 좋다.

“주님, 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이 고백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감사다. 내 감정이 동의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 성경이 말하는 “범사에 감사”는 바로 이것이다.

감사하려고 애쓰지 마라. 먼저 그분을 보라. 그분의 거룩하심, 신실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구속의 영광 — 이것이 영혼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감사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고통 중인 형제자매 곁에 있는 당신에게도 한 마디. 감사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함께 앉으라. 욥의 세 친구가 7일간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을 때 — 그것이 그들이 한 가장 좋은 목양이었다.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먼저다.

12 그들이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인 줄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고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 위에 뿌리고

13 그와 함께 칠 일 칠 야를 땅에 앉았으나 욥의 괴로움이 심함을 봄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 — 욥기 2:12-13

감사는 결국 방향의 문제다. 내 형편을 바라보느냐, 형편 너머의 분을 바라보느냐. 그리고 그 시선의 전환은, “주님, 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라는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