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여성을 차별한다.”
이 문장은 교회 밖에서만 들리는 말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조용히 품어온 의문이다.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말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하며, “가르치지 말라”고 금하는 책 —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정직하게 이 질문과 마주하자. 성경이 실제로 여성을 차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다면, 그 오해도 똑같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남녀 모두에게 있다
모든 논의에 앞서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펼쳐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남성에게 주어지고 여성에게 빌려준 것이 아니다.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동등하게 담지한다. 이것이 성경의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을 놓치면, 이후의 모든 구절을 왜곡하게 된다.
갈라디아서는 이 진리를 구원론적으로 확인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동등성.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다. 그렇다면 소위 ‘차별 구절’이라 불리는 본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머리”는 지배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고린도전서 11:3
여기서 “머리”(κεφαλή, 케팔레)를 현대적 의미의 “보스”로 읽으면, 이 구절은 즉시 차별이 된다. 그러나 1세기 헬라어에서 케팔레는 “근원”(source)의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물줄기의 머리, 곧 수원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구절에 삼위일체의 유비를 집어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한가? 니케아 신경 이래 교회는 단호하게 답해왔다 — 성부와 성자는 본질에서 완전히 동등하다. 그러나 영원한 질서가 있다. 동등성과 질서는 모순이 아니다. 삼위일체가 그 증거다.
”잠잠하라”는 침묵 명령이 아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복종할 것이요” — 고린도전서 14:34
이 구절만 떼어내면, 여성은 예배 중에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같은 편지, 불과 세 장 앞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 고린도전서 11:4-5
바울은 여성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14장의 “잠잠하라”는 일체의 발언 금지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 대한 지침이다.
실제로 “잠잠하라”(σιγάω, 시가오)는 같은 14장에서 세 번 등장한다 — 방언하는 자에게(28절), 예언하는 자에게(30절), 그리고 여성에게(34절). 세 경우 모두 핵심은 같다: 예배의 질서를 지키라. 바울이 금한 것은 여성의 발언이 아니라 예배의 혼란이다.
”가르치지 말라”의 진짜 맥락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 디모데전서 2:11-12
여기서 “주관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αὐθεντεῖν(아우텐테인)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단어다(hapax legomenon). 일반적인 “권위를 행사하다”(ἐξουσιάζω)와 달리, 이 단어는 “권위를 찬탈하다”, “제멋대로 지배하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다.
에베소 교회는 당시 거짓 교사의 문제로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딤전 1:3-7). 바울이 금지한 것은 여성의 가르침 자체가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권위를 찬탈하며 거짓을 가르치는 행위였다.
이것이 추측이 아닌 이유가 있다. 바울 자신이 여성 사역자들을 인정하고 칭찬했기 때문이다.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고(행 18:26), 바울은 유니아를 “사도 중에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불렀다(롬 16:7).
”순종하라”의 잃어버린 첫 문장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에베소서 5:22
이 구절은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많이 오용되는 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원문 헬라어에서 22절에는 동사가 없다. “복종하라”는 동사는 바로 앞 21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에베소서 5:21
21절의 상호 복종이 22절의 문맥이다. 아내의 복종은 일방적 굴종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서로에게 지는 복종의 한 양태다. 그리고 이 복종의 동기는 남편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실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졌을 때,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남종과 여종들 위에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 사도행전 2:17-18
성령의 은사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 하나님은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여성을 침묵시켜 왔는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 우리가 물려받은 것의 상당 부분은 성경이 아니라 유교적 가부장 문화를 성경 언어로 포장한 것이었다. “남녀유별”을 “머리됨”으로, “삼종지도”를 “순종”으로 바꿔 불렀을 뿐, 그 뿌리는 공자에게 더 가까웠다.
성경은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질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 그리고 이 질문이야말로 핵심이다.
차별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했다. 그런데 질서가 과연 사랑이 될 수 있는가? 권위와 순종이라는 말에서 사랑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만약 성경이 말하는 질서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 권력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라면 — 그것은 우리가 알던 모든 관계의 문법을 다시 쓰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