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서가 있었는데 왜 성경에 없는가 — 묵시문학의 홍수 속에서 정경을 읽는 법

에녹서가 있었는데 왜 성경에 없는가 — 묵시문학의 홍수 속에서 정경을 읽는 법

#성경론#정경#변증#묵시문학

사라지지 않는 매혹

에녹서(1 Enoch)는 사라진 적이 없다. 쿰란 동굴에서 아람어 사본이 발견되었고, 에티오피아 교회는 지금도 이 책을 정경으로 읽는다. 유튜브에서는 “교회가 숨긴 금서”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수만 조회수를 끌어모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경인 유다서가 이 책의 내용을 직접 인용한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의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 유다서 1:14-15

정경인 성경이 인용했는데 왜 정경이 아닌가. 이 질문은 정직하며, 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에녹서 하나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에녹서가 떠다니던 그 바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


묵시문학의 홍수 — 에녹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유대 세계에는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 범람했다. 에녹서 외에도 희년서, 모세의 승천, 바룩 2서, 에스라 4서, 솔로몬의 시편 등 수십 종의 문헌이 쏟아져 나왔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성전 모독, 로마의 유대 압제, 성전 파괴 — 이 연속된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묻고 싶었다. “왜 의인이 고난받는가?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묵시문학은 그 갈증에 응답하는 장르였고, 이를 이용해 유명한 고대 인물들의 이름을 빌린 위작들이 쏟아졌다.

에녹서는 이 홍수 속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헌이었다. 쿰란 공동체는 에녹서 사본을 다수 소유했고,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한때 그 권위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물어야 한다. 인기가 곧 권위인가? 많이 읽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정경은 투표로 결정되지 않았다

흔한 오해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앉아, 후보 목록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나머지를 버렸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매력적이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정경의 형성은 발명이 아니라 인식이었다. 교회는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위를 식별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4항은 이 원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 저자이신 하나님께만 의존한다.”

교회가 사용한 분별의 기준은 세 가지였다. 사도성(apostolicity) — 사도 또는 사도적 권위 아래 기록되었는가. 보편성(catholicity) — 교회 전체가 공적 예배에서 받아들였는가. 정통성(orthodoxy) — 이미 확정된 신앙의 규범과 일치하는가.

에녹서는 이 세 기준 모두에서 결격이었다. 사도가 쓰지 않았고, 교회 전체가 수납하지 않았으며,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정경의 가르침과 긴장을 이루었다.


에녹서 안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에녹서 자체를 읽어보면, 왜 교회가 이 책을 정경으로 인식하지 못했는지가 드러난다. 에녹서의 ‘파수꾼의 서’(Book of the Watchers)는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 여성과 결합하여 거인족 네피림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상세히 전개한다. 창세기 6장의 간결한 기사를 수십 배로 확장하면서, 천사들의 이름, 그들이 가르친 금속 세공과 주술의 목록, 하늘의 지리를 장대하게 펼쳐놓는다.

문제는 이런 상세함이 성경의 계시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은 천상의 비밀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에게 속한 것이요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명기 29:29

더 결정적으로, 에녹서는 죄의 기원을 타락한 천사들의 외부적 침입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운 불순종에서 찾는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로마서 5:12

아담 안에서의 타락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이라는 성경의 구속 서사는, 죄의 뿌리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전제 위에 선다. 에녹서식 설명은 이 전제를 흔든다.


인용은 정경 승인이 아니다

유다서의 인용 문제는 이미 결정적인 선례가 있다. 바울은 이방 시인 아라투스를 인용했고(행 17:28), 에피메니데스를 인용했으며(딛 1:12), 메난드로스를 인용했다(고전 15:33). 어느 누구도 이 인용 때문에 그리스 시집을 성경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성령의 영감은 인용된 자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기자에게 임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유다는 에녹서를 정경으로 승인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심판 사상을 성령의 인도 아래 자신의 서신에 재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 사상 자체는 에녹서의 발명품이 아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선언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 스가랴 14:5

광부가 돌무더기에서 금을 캐낼 때, 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돌무더기 전체가 아니라 광부의 선별이다. 성령께서는 에녹서에서 진리의 금 한 조각을 취하셔서 유다서에 놓으셨다. 나머지는 놓아두셨다. 그 선별 자체가, 정경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비밀 지식의 유혹을 분별하라

에녹서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 상당 부분은 “교회가 숨긴 진실”이라는 프레임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의 비유를 독점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집단, 성경 위에 별도의 계시를 올려놓는 종파들이 이 프레임을 적극 활용한다. 정경에 의문을 심어 자신들의 지도자 권위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비밀 클럽의 신이 아니시다.

내가 땅의 어두운 곳 은밀한 데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의 자손에게 나를 헛되이 찾으라 하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선포하느니라” — 이사야 45:19

계시의 역사는 점진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1:1-2

아들 이후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성경 66권은 편집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완전한 기록이다. 에녹서는 흥미로운 역사적 문헌이다. 제2성전기 유대인들의 신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손에 쥔 성경을 더 깊이 파는 것이, 사라진 금서를 찾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큰 발견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디모데후서 3:16-17

공유하기

이어서 읽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