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이혼의 원칙을 살펴보았다. 결혼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며 영속적이되, 간음과 악의적 유기라는 두 가지 예외가 있다. 그러나 원칙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삶이 있다. 이미 이혼을 경험한 사람,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채 이혼한 사람, 재혼을 고민하는 사람 — 이들에게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혼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다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9
“모든 불의에서.” 성경이 말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성령 훼방죄 단 하나뿐이다. 이혼은 그것이 아니다. 이혼이 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덮지 못할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걱정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혼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는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를 핑계로 죄를 짓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가 그를 거룩함으로 이끈다. 바울이 이미 물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로마서 6:1-2
먼저 다가오신 분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이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요한복음 4:17-18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다섯 번 결혼하고 지금은 동거 중인 여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오에 홀로 물을 길으러 온 여인.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다 아시면서 먼저 말을 거셨다.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생수를 주러 오셨다.
또 다른 장면이 있다.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인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돌을 들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8:10-11
순서를 보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가 먼저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그 다음이다. 은혜가 먼저이고, 거룩함의 부르심이 그 뒤를 따른다. 정죄가 먼저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재혼에 대하여
재혼 문제는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신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은 간음이나 고의적 유기로 인한 이혼의 경우, 무고한 편에게 재혼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몇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재혼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재혼하지 않는 삶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
둘째, 성경적 근거 없이 이혼한 경우라도, 진정한 회개가 있다면 과거가 미래를 영원히 봉쇄하지 않는다. 단, 이혼의 귀책 여부에 따라 재혼의 자유가 달라진다는 점은 개혁주의 전통이 신중하게 다루어온 문제다. 이 부분은 목사와 당회의 목회적 상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재혼을 고려한다면 깊이 살펴야 한다. 이전 결혼에서 자신의 잘못은 없었는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치유받았는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 공동체의 지지와 당회의 지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은 영구 배제의 근거인가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 디모데전서 3:2
이 구절은 한국 교회에서 이혼 경험자를 장로·집사 직분에서 영구 배제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한 아내의 남편”(μιᾶς γυναικὸς ἄνδρ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석이 나뉜다.
이 표현은 현재의 결혼에서의 신실함 — 즉 일부일처의 성적 정절 — 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첩을 두거나 매춘부를 찾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금지한 것이 “과거에 이혼 경험이 있는 자”인지, 아니면 “현재 한 아내에게 신실하지 않은 자”인지는 본문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구절의 해석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다양하며, 교회마다 신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이 이혼 경험자를 인격적으로 정죄하는 근거가 아니라, 직분자의 자격을 목회적으로 살피라는 권면이라는 점이다. 해석의 최종 판단은 당회의 분별에 맡겨야 한다.
교회는 병원이지 법정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 이혼자에 대한 정죄는 넘치되, 돌봄은 없다. 이혼 사실을 알게 되면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직분에서 제외하고, 암묵적으로 밀어낸다. 이혼 경험자는 교회에서 가장 숨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곳은 어디였는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가복음 2:17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의 클럽이 아니다. 교회는 병든 자가 치유받는 곳이다. 이혼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교회를 가장 무서워한다면, 교회가 복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혼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교회를 가장 두려워한다면, 교회가 돌봄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복음의 규율과 복음의 긍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 치리는 죄를 경고하면서도 회복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 이사야 42: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이혼의 짐보다 무거운 짐이 있겠는가. 실패의 낙인, 죄책감, 자녀에 대한 미안함, 혼자가 된 두려움, 교회의 시선. 이 모든 짐을 지고 있는 형제자매에게,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수가 성의 여인은 그 날 이후 온 동네에 달려가 외쳤다.
“와서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요한복음 4:29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 아시면서도 생수를 주신 분.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외쳤다. 과거가 그녀의 미래를 막지 못했다. 은혜가 과거보다 컸기 때문이다.
교회는 진리와 은혜를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결혼의 영속성을 가르치면서도, 깨어진 자 앞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값싼 위로도 아니고, 냉혹한 율법도 아닌 —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그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만도 아니고, 진리만도 아니다. 둘이 함께 충만한 것 —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교회가 이혼 경험자 앞에서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이, 오늘도 당신을 찾고 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