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재혼 1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 성경이 말하는 이혼의 원칙

이혼과 재혼 1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 성경이 말하는 이혼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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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가 무겁다. 이혼은 통계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미 그 고통을 지나왔을 수 있고, 누군가는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 정직하게, 더 정확하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율법이 아니라 창세기로 돌아가셨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마태복음 19:6

“한 몸”(בָּשָׂר אֶחָד, 바사르 에하드)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 아니다. 히브리어 ‘바사르’는 인격 전체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영적, 정서적, 육체적 차원 모두에서의 전인적 연합이다. 그리고 그 연합을 맺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24

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맺어진 언약이다. 이것이 결혼의 영속성의 근거다. 인간이 임의로 해체할 수 없는 이유는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세의 이혼법은 양보였다

바리새인들은 반박했다.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마태복음 19:8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 한마디가 전체 논의의 방향을 잡는다. 모세의 이혼 허용은 하나님의 이상이 아니라 타락한 현실에 대한 양보(concessio)였다. 이혼이 이미 만연한 사회에서, 아내를 내쫓고도 아무 보호 장치 없이 방치하는 더 큰 불의를 막기 위한 규정이었다. 허용은 승인이 아니다.

첫 번째 예외: 음행의 연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 마태복음 19:9

“음행한 이유 외에.” 여기서 ‘음행’으로 번역된 헬라어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는 일반적인 ‘간음’(μοιχεία)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다. 결혼 언약에 대한 근본적 배신, 즉 “한 몸”의 연합을 파괴하는 성적 불륜 전반을 가리킨다. 다만 이 예외 조항은 명백한 성적 불신실의 경우에 적용되며, 성격 차이나 관계의 불만족으로 확장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난다.

여기서 두 가지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첫째, 이것은 이혼의 허용이지 명령이 아니다. 배우자가 간음했다고 해서 반드시 이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 높은 길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불신실한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온 것이 바로 그 모범이다.

둘째, 그러나 무고한 배우자에게 이혼의 자유가 있다. 언약을 파기한 것은 간음한 쪽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피해자에게 깨어진 언약에 영원히 묶여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두 번째 예외: 불신자의 유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또 다른 상황을 다룬다. 한쪽이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쪽이 불신자인 경우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7:15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불신 배우자가 스스로 떠날 때, 신자는 그 관계에 결박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바울의 특권’(privilegium Paulinum)이다. 간음이 육체적 연합의 파괴라면, 악의적 유기는 언약적 연합의 실질적 파괴다. 두 경우 모두, 한쪽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단, 이것은 신자가 먼저 쫓아낸 것이 아니라, 불신자가 스스로 떠난 경우에 해당한다. 바울은 직전 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혹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아내를 버리지 말며” — 고린도전서 7:12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라. 떠나려 하면 붙잡지 말라. 바울의 지혜는 이 양면에 있다.

”이혼을 미워하시느니라”의 진짜 문맥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에 학대를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하지 말지니라” — 말라기 2:16

이 구절은 종종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절대 명제로 인용된다. 맞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그러나 문맥을 보라. 말라기가 고발하는 것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유대인 아내를 내쫓는 행위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이혼이라는 사태다 — 그 고통, 그 깨어짐, 그 배신. “이혼한 사람을 미워한다”고 하신 적은 없다. 이 구분을 놓치면, 이미 상처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미움까지 덧씌우는 잔인한 신학이 된다.

개혁주의 전통의 종합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은 이 모든 성경적 원칙을 종합한다. 결혼의 영속성을 확인하면서도, 간음과 고의적 유기의 경우에 이혼을 허용하고, 무고한 편의 재혼을 인정한다. 이것은 결혼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증언을 균형 있게 따르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독자적 결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신앙고백은 이혼과 재혼의 문제가 교회 당회의 목회적 지도와 공동체의 확인 안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전제한다.

한국 교회는 이 균형을 잃어왔다. 이혼자를 향한 정죄는 넘치되, 목회적 돌봄은 부족했다. 유교적 체면 문화가 뒤섞여, 이혼은 “수치”가 되었고, 이혼 경험자는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낙인을 달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이 이혼을 허용하는 조건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렵고, 더 절실한 질문이 남는다. 이미 이혼한 사람에게, 그리고 성경적 근거가 불분명한 채 이혼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만약 은혜가 진짜라면, 그 은혜는 깨어진 언약 앞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가 — 그 답이 2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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