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피조물이라면, 십자가는 무너진다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십자가는 무너진다

#이단비판#삼위일체#그리스도론#니케아신조#아리우스주의

한 단어가 바뀌면 복음이 무너진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이 고백을 “말씀은 하나의 신이었다”로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단어 하나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기독교 복음 전체의 붕괴다.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면, 십자가 위의 죽음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기 헌신이 아니라 한 피조물의 비극적 최후에 불과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예수를 최초의 피조물로 가르치는 서방 기원의 한 단체가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는 성경에 없는 이교적 교리”라 주장하며, 예수를 대천사 미가엘과 동일시하고, 성령을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활동력으로 격하한다. 이 주장들은 4세기 아리우스가 제기했고, 교회가 정면으로 맞서 정죄한 바로 그 이단이 현대의 옷을 입고 되돌아온 것이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는 2세기 말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했다.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어가 없다는 것과 교리가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110년경)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터툴리안(200년경)은 “한 본질 안의 세 위격”이라는 정식 표현을 사용했다. 성경 자체가 삼위일체적 구조를 증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마태복음 28:19

여기서 ‘이름’(ὄνομα)은 단수다. 세 위격이 하나의 이름 아래 동등하게 나란히 놓인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은 이름 아래 놓일 수 있는가?


요한복음 1:1 — 원문이 말하는 것

이 단체의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 조작은 요한복음 1:1에서 일어난다. θεός(하나님)에 정관사(ὁ)가 없으므로 “하나의 신(a god)“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헬라어 학자 대니얼 월리스(Daniel B. Wallace)는 이 구절의 θεός를 **정성적(qualitative)**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분석한다. 즉, 관사의 부재는 “하나의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본질에 있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다음 구절이 이를 결정적으로 확인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2-3

만물이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창조한 것이 된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도마의 무릎, 바울의 선언, 아버지의 증언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한복음 20:28

예수는 이 고백을 꾸짖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은 우상숭배이며, 예수는 즉시 바로잡아야 했다. 사도행전 10:25-26에서 베드로가, 요한계시록 22:8-9에서 천사가 사람의 경배를 거부한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바울은 더 직접적으로 선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빌립보서 2:6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기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전한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 히브리서 1:8

아버지가 아들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겠는가?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 요한복음 17:5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졌다. 피조물은 창세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피조물의 피로는 영원한 빚을 갚을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7문은 이를 정확히 짚는다:

문: 우리의 중보자는 왜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으로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의와 생명을 얻어 회복시켜 주실 수 있도록,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피조물은 유한하다. 유한한 존재의 희생은 유한한 값만 치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한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동일 본질, 동일 권능, 동일 영원의 세 위격이 계시니,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오래된 이단, 같은 대답

325년 니케아에 모인 교부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정죄했다. 아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신 것이며, 아버지와 동일 본질(ὁμοούσιος)“이다.

1,700년이 지났다. 같은 주장이 현대의 언어와 번역본을 입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성경은 바뀌지 않았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도마는 그를 “나의 하나님”이라 불렀으며, 아버지는 그를 “하나님이여”라 부르셨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단지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 자신이 감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 이것이 복음이다. 이 고리에서 ‘하나님’을 빼는 순간, 남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한 피조물의 안타까운 죽음뿐이다.

교회는 1,700년 전에도 이 질문에 답했고, 오늘도 같은 답을 한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공유하기

auto_awesome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