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로마가 불탔다, 그리고 누군가가 필요했다
서기 64년 7월, 로마가 불탔다. 대화재는 엿새 동안 타올랐고, 도시의 14개 구역 중 10개가 피해를 입었다.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화재의 원인은 지금도 불명확하지만, 당시 시민들의 의심은 한 사람을 향했다 — 황제 네로. 새 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졌다.
네로는 시선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가 지목한 집단이 바로 기독교인이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네로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자들, 민중이 ‘크리스티아니’라 부르는 자들에게 죄를 씌웠다.” 기독교인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개에게 물려 죽거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해가 진 뒤 정원의 횃불 대신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된 첫 장면이다. 그리고 이 박해는 250년간 계속된다.
왜 기독교인은 박해를 받았나
로마 제국은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다.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자기네 만신전에 흡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기독교인만 문제가 됐을까?
황제 숭배 거부. 로마 시민은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는 의식에 참여해야 했다. 기독교인은 이를 거부했다. “예수만이 주(Kyrios)이다”라는 고백은 종교적 선언인 동시에 정치적 반역이었다.
비밀 집회에 대한 오해. 기독교인은 이른 새벽이나 밤에 개인 집에서 모였다. 성찬식에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하는 의식은 식인 의례로 오해받았다. 형제자매라 부르며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관습은 근친상간으로 소문이 났다.
“무신론자”라는 비난. 로마인의 눈에 기독교인은 신전도 없고, 제물도 바치지 않고, 신상도 없는 자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을 섬기지 않으니, 차라리 신이 없는 자들 — 즉 “무신론자”로 분류됐다.

박해의 전개 — 간헐적 탄압에서 제국 전체의 말살로
박해는 처음부터 조직적이지 않았다. 시기에 따라 강도와 범위가 달랐다.
네로(64년)는 로마 시내에 한정된 박해였다. 잔혹했지만 제국 차원의 정책은 아니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이 시기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 콜로세움 내부. 네로 시대 이후 기독교인들이 맹수에게 던져지는 형벌을 받은 현장이다. 사진: Fubar Obfusco,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트라야누스 황제(112년경)의 시대에 소아시아 총독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독교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트라야누스의 답신은 로마의 공식 정책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색출하지는 마라. 다만 고발당한 자가 신앙을 철회하지 않으면 처벌하라.” 묘한 이중 기준이었다 — 찾아 나서지는 말되, 잡히면 죽이라는 것이었다.
데키우스(250년)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제국의 모든 시민에게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증명서(리벨루스)를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제국 전체 규모 박해였다.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했고, 적지 않은 수가 배교하거나 증명서를 위조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303-311년)의 “대박해”는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했다.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소각, 성직자 투옥, 제사 강요 — 기독교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시도였다.
순교자들 — 죽음 앞에서 한 말
박해의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증언은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남긴 말이다.
이그나티우스(안디옥 주교, 107년경 순교)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던져지기 위해 호송되던 중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다. 그 중 유명한 문장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밀입니다.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순결한 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처형을 막지 말라고 부탁했다.
폴리카르푸스(서머나 주교, 155년경 순교)는 86세의 노인이었다. 재판관이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86년간 내가 그를 섬겼는데, 그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셨다.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어찌 모독할 수 있겠는가?”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페르페투아(카르타고의 귀족 여성, 203년 순교)는 갓 아이를 낳은 22세의 젊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눈물로 배교를 간청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감옥에서 쓴 일기가 남아 있는데, 초대교회 문헌 중 여성이 직접 남긴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다. 그녀는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와 검투사에 의해 죽었다.
카타콤바 — 지하의 교회
로마의 카타콤바(지하 묘지)는 흔히 박해를 피한 은신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좀 다르다. 로마법은 매장지를 신성한 장소로 보호했기 때문에, 카타콤바는 주로 죽은 자를 묻고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순교자의 무덤 곁에서 예배를 드렸고, 벽에는 물고기(익투스), 양치기, 기도하는 사람의 그림이 그려졌다.
카타콤바의 벽화는 초대 기독교 미술의 가장 오래된 증거다. 화려한 성당이 없던 시대, 지하 갱도의 벽에 그려진 소박한 그림이 당시 신자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박해가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교회는 박해 속에서 성장했다.
2세기의 기독교 변호론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역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순교자의 피는 씨앗이다(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 처형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저들은 왜 저렇게 죽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그 질문이 때로 회심으로 이어졌다.
300년경, 기독교인은 로마 제국 인구의 약 10%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는 이미 너무 커져 버린 이 공동체를 부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와 역사의 전환
312년, 로마 제국의 권력을 놓고 다투던 장군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록마다 조금 다르지만, 전승에 따르면 하늘에서 십자가 형상과 함께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In hoc signo vinces)“라는 문구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상징(키로, ☧)을 새기게 했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5년, 로마).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전투 이후 기독교의 운명이 바뀌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이듬해인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다. 핵심 내용은 단순했다 —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 기독교인에게 몰수했던 재산을 돌려주고, 공개적인 예배를 허용했다.
250년간의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난 순간이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쓴 지 250년 만에, 기독교는 로마 황제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그 날에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가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디모데후서 4:7-8
바울이 순교 직전 쓴 이 문장은, 250년간 박해를 견딘 수많은 신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가 남긴 것
박해 시대의 교회는 세 가지를 증명했다.
첫째, 신앙은 안전이 보장될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문화나 관습이 아니라 진짜 믿음이었다.
둘째, 박해는 교회를 흩뜨렸지만, 흩어진 곳마다 새로운 공동체가 생겼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신자들이 안디옥으로, 소아시아로, 북아프리카로 퍼졌고, 거기서 다시 복음이 전해졌다.
셋째, 제국의 보호라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문과 마주했다. 권력과 신앙의 관계, 국가와 교회의 경계 — 이 질문은 이후 1,700년간 기독교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밖의 적이 사라지자, 안의 질문이 폭발했다. “예수는 정확히 누구인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인가?” 이 질문을 두고 교회는 거의 찢어질 뻔했다. 그 이야기가 A3편의 주제다.
개혁주의의 견해
박해와 교회의 정화. 개혁주의 신학은 핍박이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교회를 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박해의 시대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으므로, 이익을 위해 교회에 머무는 거짓 신자가 자연스럽게 걸러졌다. 칼뱅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 요소라고 가르쳤으며, 이 시대의 순교자들이 그 가르침의 역사적 증거가 된다.
섭리 속의 확장. 박해를 통해 오히려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진 것은, 개혁주의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여준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대로,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니라.” — 사도행전 8:1, 4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작동한 사례다.
콘스탄티누스 전환의 양면. 개혁주의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을 단순히 축복으로만 보지 않는다. 공개 예배와 성경 보급이 가능해진 것은 분명한 유익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는 동시에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신앙의 순수한 고백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국가 교회’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순수성을 외친 것은, 이 시기에 시작된 교회와 국가의 뒤엉킴에 대한 교정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