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C1: 한국에 복음이 오다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C1: 한국에 복음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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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있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서양 선교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보다 훨씬 독특하다. 한국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자국민이 스스로 복음을 찾아 나선 나라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불과 한 세대 만에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타임라인 — 한국 기독교의 첫 120년

연도사건
1784이승훈, 베이징에서 가톨릭 세례 — 한국 기독교의 시작
1836~1866가톨릭 박해 —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순교자 발생
1882존 로스(John Ross), 만주에서 한글 성경 번역 출판 (누가복음·요한복음)
1884알렌(Horace Allen),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입국
1885.4.5언더우드·아펜젤러, 부활절에 제물포 도착
1885배재학당 설립, 제중원(광혜원) 개원 — 근대 교육·의료의 시작
1886이화학당 설립 — 근대 여성 교육의 시작
1890네비우스, 한국 방문 — 자립·자치·자전 선교 방법론 전수
1893장로교 공의회, 네비우스 방법론 공식 채택
1907.1평양 대부흥 — 한국 교회의 영적 원점
1907.9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안수
1912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
19193.1운동 — 기독교인의 참여 (C2에서 상세)

한국 초기 선교 지도


스스로 복음을 찾아 나선 사람들

이승훈의 세례 — 선교사 없는 기독교의 시작

1784년, 조선의 젊은 유학자 이승훈은 아버지의 사절단을 따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예수회 선교사 장 조제프 드 그라몽(Jean-Joseph de Grammont) 신부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베드로 — 이 땅에 교회의 기초를 놓으라는 의미였다. 이승훈은 귀국 후 동료 학자들에게 신앙을 전하고, 1784년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출발점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외국 선교사의 파송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선교사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현지인이 스스로 세례를 받아 온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 한국 기독교는 태생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순교의 피 — 가톨릭 박해 시대

그러나 새 신앙은 곧 시련을 만났다. 유교적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 왕조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비롯한 수차례의 박해로 수천 명이 순교했다. 프랑스 선교사들도 처형당했다. 박해는 잔혹했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오히려 신앙의 씨앗이 되었다 —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한 대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었다.

로스 성경 — 만주에서 건너온 한글 복음

가톨릭이 박해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동안, 개신교의 씨앗은 전혀 다른 경로로 뿌려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는 만주에서 한국인 동역자들 —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등 — 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글로 출판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한글 성경이다.

번역에 참여한 서상륜은 이 성경을 품에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에서 친척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1883년경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 서양 선교사가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땅에서, 한국인이 한글 성경을 읽고 스스로 세운 교회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유학자 이수정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했다(1885년 출판). 이 성경은 훗날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오게 된다.


선교사의 도착 — 부활절의 상륙

알렌, 의술로 문을 열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조선에 입국했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터졌고 개화파 지도자 민영익이 칼에 깊이 찔려 생사의 기로에 섰다. 알렌은 서양 의학으로 민영익을 치료해 살려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은 알렌은 1885년 4월, 조선 최초의 근대 병원인 광혜원 (곧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했다. 의술이 복음의 문을 연 것이다.

1885년 4월 5일 — 부활절의 제물포

알렌이 의료 선교로 기반을 닦은 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봄비가 내리는 제물포항에 두 사람이 내렸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같은 배를 탔지만 교파는 달랐다. 그들의 손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품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발을 디뎠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1859~1916)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85년 부활절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새문안교회 설립자이자 한글 성경 번역 위원.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를 설립하며, 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1885)을 세워 근대 교육의 문을 열었다.

새문안교회의 옛 모습 — 언더우드의 그림 초기 새문안교회를 그린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친필 회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한국인 세례교인 14인과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886년에는 감리교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설립해, 유교적 관습에 갇혀 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복음은 학교와 병원을 통해 조선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성장의 비밀 — 네비우스 방법론

한국 개신교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하나의 결정적 선교 전략이 있었다. 중국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Nevius)가 개발한 네비우스 방법론이다.

1890년, 네비우스는 한국을 2주간 방문하여 당시 7명에 불과했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방법론을 전수했다. 핵심은 세 가지 원칙이었다:

  • 자립(Self-support) — 교회 건물과 목회자 생활비를 한국인이 스스로 부담한다
  • 자치(Self-government) — 교회 운영을 한국인 지도자가 맡는다
  • 자전(Self-propagation) — 믿는 이가 직접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 원칙은 서양 선교 역사에서 혁명적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 현장에서는 선교사가 돈을 대고, 선교사가 결정하고, 선교사가 전도했다. 그 결과 선교사가 떠나면 교회도 무너졌다. 네비우스는 경고했다 — “처음부터 자립을 가르치지 않으면, 곧 너무 늦어진다.”

1893년 장로교 공의회는 이 방법론을 공식 채택했다. 아직 조선 전체에 개신교 신자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성인 장로교 세례 교인은 103명밖에 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너무 이른” 결정이 한국 교회의 체질을 결정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였다. 서양의 자선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1907년 — 두 번의 역사적 사건

평양 대부흥 — 한국 교회의 영적 원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남성 사경회(성경공부 집회)가 열렸다.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로 길선주가 일어나 고백했다 —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그는 죽은 친구가 맡긴 100원을 횡령한 죄를 회중 앞에서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이 물꼬를 트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통곡과 기도가 밤새 이어졌다.

이 부흥은 평양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특징적인 것은, 이것이 감정적 흥분만이 아니라 도덕적 갱신을 수반했다는 점이다. 훔친 물건을 돌려주고, 원수를 용서하고, 끊지 못하던 악습을 버렸다. 삶이 변했다. 1905년 개신교 신자 37,000여 명이던 것이 대부흥 이후 73,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사도행전 1:8

독노회 — 한국인의 교회가 되다

같은 해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독립 노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인 장로 40명과 선교사 38명이 참석했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방기창 — 이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 안수받았다.

네비우스 방법론의 열매가 여기서 빛났다. 선교사가 도착한 지 불과 22년 만에, 한국인이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고 목사를 세웠다. 안수받은 7인 중 이기풍은 즉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 외국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은 한국 교회가, 이제 자국민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오해와 진실

기독교는 서양 종교 아닌가?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이승훈은 스스로 세례를 받으러 갔고, 서상륜은 스스로 성경을 들고 와서 교회를 세웠다. 선교사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이 수동적으로 복음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한국인의 주도성이 살아 있었다. 네비우스 방법론은 이 주도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나?

19세기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는 복잡하다. 일부 선교사가 서양 문화를 복음과 동일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선교사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인의 편에 섰다. 언더우드는 한글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근대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떠난 뒤에도 한국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평양 대부흥은 과장된 것 아닌가?

역사적 기록은 풍부하다. 당시 참석한 선교사들의 보고서, 편지, 일기가 남아 있고, 부흥 이후 교인 수의 급증은 통계로 확인된다. 물론 모든 부흥 운동이 그렇듯 과장된 요소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 교회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사건이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현재는 어디에 있나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시작된 한국 기독교는, 2025년 현재 인구의 약 20%가 개신교 그리스도인인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2위의 선교 대국이다. 서울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때 세계 최대 교회로 기록되기도 했다.

1885년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는 여전히 서울 도심에 서 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배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발전했다. 알렌의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져 한국 근대 의학의 산실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걸어온 길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장 뒤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고, 교회는 곧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 선택의 순간,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었고 어떤 이들은 끝까지 서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 그리고 그 상처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까지 이어져 있다.


개혁주의의 견해

이 글의 본문은 한국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며, 이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를 이 섹션에서 드러낸다.

한국 기독교의 자생성에 대하여. 이승훈이 스스로 세례를 찾아 나서고, 서상륜이 한글 성경을 들고 와서 교회를 세운 것은 인간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이 사건들 뒤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본다. 사람이 복음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미리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복음이 한국에 온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 요한복음 15:16

네비우스 방법론에 대하여. 자립·자치·자전의 원칙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깊이 공명한다. 개혁주의는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며, 말씀과 성례와 권징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네비우스 방법론이 한국 장로교에 채택된 것은 단순한 선교 전략의 성공이 아니라, 성경적 교회론이 실제로 구현된 사례다. 외부의 재정적 의존 없이 교회가 자립한 것은, 교회의 참된 주인이 선교사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보여준다.

평양 대부흥에 대하여. 1907년 대부흥은 개혁주의 전통이 경계하는 “감정주의적 부흥”과 구별된다. 이 부흥의 핵심은 방언이나 신비 체험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였다. 성경 사경회(성경공부) 중에 성령이 역사하셨고, 그 결과는 도덕적 갱신으로 나타났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제시한 참된 부흥의 기준 —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고, 삶의 열매로 입증되는 부흥 — 에 비추어 볼 때, 평양 대부흥은 성령의 참된 역사로 평가할 수 있다.

가톨릭 순교자들에 대하여. 조선 시대 가톨릭 순교자들의 신앙적 용기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개혁주의는 천주교의 신학 체계 — 교황 무류성, 마리아론, 공로 사상 — 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믿음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순교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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