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같은 신앙고백, 다른 언어
“우리는 한 교회인가, 두 교회인가?”
A3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네 번의 공의회는 기독교의 교리적 뼈대를 세웠다. 그러나 교리의 일치가 교회의 일치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칼케돈 이후 동방의 일부 교회는 이미 갈라져 나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쌓이고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크게 세 갈래다 — 로마 가톨릭(천주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 이 중 처음 두 갈래가 갈라진 사건이 바로 1054년 대분열(Great Schism)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칼케돈 공의회(451년)부터 1054년까지 약 600년 동안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쌓여온 균열의 결과였다.
그 균열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600년의 균열 — 하나의 교회, 두 개의 세계
언어와 문화의 장벽
로마 제국은 동쪽과 서쪽이 달랐다. 서방은 라틴어를 썼고, 동방은 그리스어를 썼다. 공의회 시대에는 양쪽의 신학자들이 서로의 언어를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5세기 이후 이 소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서방의 신학자들은 그리스어 교부들을 읽지 못하게 되었고, 동방의 신학자들은 라틴어 저작을 접할 기회가 사라졌다. 같은 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로 사유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치적 분리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치적 분리가 가속되었다. 서방에서는 교황이 세속 권력의 공백을 채우며 정치적·영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만이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믿었던 동방에게 이것은 도발이었다.
동방에서는 황제가 여전히 건재했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심포니아(symphonia), 즉 황제와 총대주교의 협력적 공존이라는 모델을 따랐다. 서방의 교황이 세속 군주 위에 서려는 것을 동방은 이해할 수 없었고, 동방의 황제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서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타임라인 — 분열을 향한 600년
| 연도 | 사건 |
|---|---|
| 451 | 칼케돈 공의회 —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등한 지위를 놓고 대립 (28조 논쟁) |
| 476 | 서로마 제국 멸망 — 서방에서 교황의 세속적 영향력 증대 |
| 589 | 톨레도 공의회 — 서방이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케(Filioque)를 추가 |
| 726–843 | 성상 파괴 논쟁(Iconoclasm) — 동서 간 긴장 심화 |
| 800 | 교황 레오 3세, 카롤루스 대제에게 황제 대관 — 동방의 반발 |
| 863 | 포티우스 분열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와 교황의 첫 공식 결별 |
| 1054 | 상호 파문 — 대분열 |
| 1204 | 제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 화해의 가능성 사실상 소멸 |
핵심 쟁점들
1. 필리오케(Filioque) — 신경을 바꿀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분열의 신학적 핵심에는 한 단어가 있었다. 필리오케(Filioque), 라틴어로 “그리고 아들에게서”라는 뜻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확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원문 그리스어는 명확하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ek tou Patros) 나오신다.
그런데 6세기 스페인의 톨레도 공의회(589년)에서 서방 교회는 이 문장에 한 단어를 추가했다 —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성령(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 처음에는 지역적 관행이었지만, 점차 서방 전체로 퍼져나갔고, 11세기에는 로마 교회의 공식 신경이 되었다.
동방의 반응은 격렬했다. 문제는 두 가지 층위에 걸쳐 있었다.
첫째, 절차의 문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세계 공의회가 확정한 것이다. 서방 교회가 일방적으로 공의회의 신경을 변경할 권리가 있는가? 동방은 “없다”고 답했다. 신경의 수정은 새로운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둘째, 신학의 문제.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 나오시는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가? 이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동방 신학은 아버지를 삼위일체의 유일한 “근원(arche)“으로 보았다. 아들과 성령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필리오케를 추가하면 이 구조가 무너지고, 아버지의 고유한 위치가 흐려진다는 것이 동방의 우려였다.
서방의 입장은 달랐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서방 신학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오신다고 이해했다. 예수 자신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성령의 발출에 아들도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요한복음 15:26
이 구절은 양쪽 모두 자기 입장의 근거로 인용했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 이것은 동방의 근거였다. “내가 … 보낼” — 이것은 서방의 근거였다. 같은 구절을 놓고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2. 교황 수위권 — 동등한 형제인가, 전체의 수장인가
교황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필리오케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깊었다.
서방에서 로마 주교(교황)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 교회의 최고 권위를 주장했다. 그 근거는 예수의 말씀이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마태복음 16:18-19
로마는 이 구절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가 그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에게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교황은 단순한 명예 서열 1위가 아니라, 모든 주교 위에 있는 관할권적 수위(jurisdictional primacy)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방은 동의하지 않았다. 동방의 교회 구조는 5대 총대주교좌(Pentarchy) —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 의 집단 지도 체제였다. 로마 주교에게 “명예상의 우선권(primus inter pares, 동등자 중 첫째)“은 인정했지만, 다른 총대주교좌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관할권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28조는 이미 이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이 조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로마 다음가는 지위를 부여했는데, 그 근거가 “신수도(新首都)이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 로마의 우선권은 제국의 수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3. 전례와 관행의 차이 — 작은 것들이 쌓이다
신학적 대립 외에도 일상적 관행의 차이가 쌓여갔다.
| 항목 | 서방(로마) | 동방(콘스탄티노폴리스) |
|---|---|---|
| 성찬 빵 | 누룩 없는 빵(아지마, azymes) | 누룩 있는 빵(프로스포라) |
| 성직자 결혼 | 금지 (독신 의무) | 주교만 독신, 사제와 부제는 결혼 허용 |
| 금식 규정 | 토요일 금식 | 토요일 금식하지 않음 |
| 세례 후 견진 | 분리 (나중에 주교가 집행) | 세례·견진·성찬을 한 번에 집행 |
| 전례 언어 | 라틴어 | 그리스어 (및 현지어) |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차이들이 수백 년간 쌓이면서 “우리”와 “그들”의 감각이 굳어졌다. 신학적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이 일상의 거리감이 타협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1054년 7월 — 되돌릴 수 없는 하루
하기아 소피아 내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립한 이 대성당에서 1054년 7월 16일, 교황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이 파문 교서를 제단 위에 놓았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특사를 보냈다. 대표는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훔베르트 추기경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도 타협에 관심이 없는 강경파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1054년 7월 16일, 훔베르트 추기경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들어가 파문 교서를 제단 위에 놓고 나갔다. 교서의 내용은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한다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훔베르트는 성당을 나서며 발의 먼지를 털었다고 한다.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며칠 뒤 그는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훔베르트와 교황 특사단을 역파문했다. 상호 파문이 완성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훔베르트가 파문 교서를 발행했을 때, 정작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1054년 4월 19일 사망). 훔베르트의 권한 자체가 의문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 자체가 분열을 만든 것은 아니다. 600년간 쌓인 균열이 이날 공식화된 것에 가깝다. 그러나 1054년 이후 동방과 서방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하나였던 교회가 둘이 되었다.
돌이킬 수 없게 만든 날 — 1204년
분열 이후에도 화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가능성을 산산조각 낸 것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는 십자군” —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840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인의 도시를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제4차 십자군은 본래 이집트를 목표로 출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해관계와 비잔틴 왕위 다툼이 얽히면서, 십자군은 방향을 틀어 같은 기독교인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1204년 4월, 도시는 함락되었다.
약탈은 끔찍했다. 십자군은 교회의 성물을 약탈하고, 하기아 소피아에서 전리품을 나눴으며, 수녀원을 침범하고, 도서관의 필사본을 파괴했다. 비잔틴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 “사라센인(이슬람교도)조차 기독교인을 정복했을 때 이보다 자비로웠다.”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 위에서 한 라틴 여성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동방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신성 모독이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제국(1204–1261)을 세우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교황 아래 강제로 편입시키려 했다. 비잔틴 제국은 1261년에 수도를 되찾았지만, 이전의 영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동방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서방에 대한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동방 정교회 전통에서 1054년보다 1204년이 더 결정적인 분열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리 논쟁은 대화로 풀 수 있다. 그러나 형제가 형제의 성전을 약탈한 기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오해와 진실
“동서 분열은 순전히 정치적 갈등이었을 뿐 아닌가?”
정치적 요소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리오케 논쟁은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 구조에 관한 것이었고, 교황 수위권 문제는 교회론의 근본에 닿아 있었다. 정치적 갈등이 분열을 촉진한 것은 맞지만, 정치가 해소되어도 신학적 차이는 남았을 것이다. 1965년 상호 파문이 철회된 이후에도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치지 못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교리 차이는 정말 큰가?”
삼위일체, 기독론, 성례 등 기본 교리에서 양측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둘 다 니케아-칼케돈의 정통 교리를 고백하며, 일곱 개의 성례(성사)를 인정하고, 사도적 계승을 주장한다. 차이는 필리오케, 교황의 무오류성과 수위권, 원죄의 정확한 이해, 연옥 교리, 마리아의 무염시태 등에서 나타난다. 핵심 교리보다 권위 구조의 차이가 더 크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동방 정교회는 우상숭배를 하는가?”
정교회의 이콘(성화상) 공경은 자주 오해를 산다. 동방 정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보이는 형체를 취하셨으므로, 그 형체를 이콘으로 묘사하고 공경하는 것은 성육신 교리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가르친다. 이콘을 통해 이콘 자체가 아니라 이콘이 가리키는 대상(그리스도, 성인)을 공경한다는 것이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 공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latria)를 명확히 구분했다. 물론 이 구분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항상 지켜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에 대해서는 하단 개혁주의 견해 섹션에서 다룬다.
하기아 소피아의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13세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왼쪽)와 세례 요한(오른쪽)이 중보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1204년 십자군 약탈 이후 복구된 작품으로, 비잔틴 예술의 정수로 평가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현재는 어디에 있나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전 세계 약 2억 2천만~2억 6천만 명의 신자를 가진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기독교 교회다. 그리스, 러시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조지아 등 동유럽과 중동에 주로 분포하며, 각국의 독립 정교회(Autocephalous Church)가 행정적으로는 자치를 유지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명예적 수위 아래 교리적·성찬적 일치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도 정교회가 있다. 1900년경 러시아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한국 정교회는 현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에 있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1965년 12월 7일 비로소 해제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동시에 900년 된 파문을 철회한 것이다. 이 사건은 화해를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지만, 교리적 차이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양 교회의 신학 대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07년 라벤나 문서에서는 교회의 보편적 수위에 대해 긍정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2016년 크레타에서는 범정교회 공의회가 열렸다 — 그러나 러시아, 불가리아, 안디옥, 조지아 정교회 등 4개 독립 교회가 불참하여, 정교회 내부의 일치도 쉽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동과 서의 분열은 지금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다. 그러나 그 상처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 대화의 출발점이다.
동서 대분열은 교회가 하나됨을 잃은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분열 이후 서방 교회는 혼자만의 길을 걸었다. 교황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수도원은 유럽 문명을 보존했으며, 십자군은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세 서방 교회 안에서, 훗날 교회를 다시 한번 뒤흔들 폭발물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개혁주의의 견해
필리오케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필리오케 교리 자체를 지지한다.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서방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 제2장 3항은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우려 — 공의회의 동의 없이 신경을 수정한 절차적 문제 — 에 대해서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 교리의 내용이 옳다 하더라도, 보편 교회의 합의를 우회한 방식은 교훈을 남긴다.
교황 수위권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교황의 전체 교회에 대한 관할권적 수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6항은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부정한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점에서 개혁주의는 동방 정교회의 입장 — 어떤 한 주교도 전체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 — 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 에베소서 4:4
이콘(성화상) 공경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동방 정교회의 이콘 공경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7-98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제2계명의 적용으로서 이콘 사용을 예배에서 배제한다. 정교회가 주장하는 “공경(veneration)“과 “예배(worship)“의 구분에 대해서도, 개혁주의는 실제 신앙생활에서 이 구분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본다.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대분열은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개혁주의는 교회의 참된 일치가 조직적·제도적 통합이 아니라 말씀과 성례의 올바른 사용에 있다고 본다. 칼뱅은 참된 교회의 표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가 제정하신 대로 시행되는 것”을 제시했다(기독교강요 4.1.9). 제도의 일치가 깨졌을 때에도, 이 표지를 충실히 따르는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