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월요일 아침 7시.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어제 예배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설교 말씀이 가슴에 남았다. 그런데 곧 현실이 밀려온다. 오늘 오전 회의에서 경쟁사보다 낮은 단가를 제시해야 한다. 마진을 줄이면 직원 월급이 위태롭다. 줄이지 않으면 수주를 놓친다. 거래처 부장은 저녁 접대를 은근히 기대한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사업을 하면서 신앙을 지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이 질문은 한국의 크리스천 사업가라면 한 번쯤 품어본 질문이다. 어쩌면 매주 품고 있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이미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다. 사업과 신앙이 본질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다는 전제다.
그 전제가 틀렸다면 어떨까.
이윤은 죄가 아니다 — 그것은 문화명령이다
성경의 첫 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8
이것은 타락 이전에 주어진 명령이다. 경제 활동, 자원 관리, 가치 창출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설계에 속한다. 전도서 기자는 이 원리를 이렇게 확인한다.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 전도서 9:10
사업을 통해 가치를 만들고, 고용을 창출하고, 이윤을 얻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활동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직업 소명(vocatio)이라 부른다.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부르신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예배다.
은혜는 사업을 파괴하지 않는다. 은혜는 사업을 회복한다. 크리스천 사업가가 품어야 할 첫 번째 확신은 이것이다. 돈을 버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오히려 사업이라는 소명에서 도망치는 것이 위탁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디모데전서 6:10
골로새서는 더 날카롭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골로새서 3:5
탐욕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다. “조금만 더”를 속삭이는 목소리의 영적 정체는 하나님의 충분하심에 대한 불신이다. 전도서 기자가 정확히 진단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 전도서 5:10
크리스천 사업가에게 탐욕은 종종 노골적인 형태로 오지 않는다. “안전을 위한 축적”, “직원들을 위해서”, “노후 대비”라는 합리적 포장을 하고 온다. 예수님은 이 자기기만을 정면으로 꿰뚫으신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 소출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누가복음 12:16-21
이 비유의 부자에게는 아무런 불법이 없었다. 땅이 소출을 냈고, 그는 합리적으로 계획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 부르셨다. 무엇이 어리석었는가? 자기가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청지기직 — 당신은 주인이 아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시편 24:1
크리스천 사업가의 자산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탁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이 원리를 선명하게 가르치신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마태복음 25:14-15
이 비유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자본의 원래 주인은 주인이지 종이 아니다. 둘째, 청지기의 임무는 수동적 보관이 아니라 능동적 관리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받았다. 셋째, 회계의 날이 온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회계할새.” — 마태복음 25:19
주인이 돌아와 회계를 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업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매출과 이익만이 아니다. 어떻게 벌었는지, 어떻게 썼는지, 누구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해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21
이 칭찬의 기준을 주목하라. “많이 벌었도다”가 아니라 “충성하였도다”이다. 하나님은 결과가 아니라 충성을 보신다.
번영신학이라는 독 — “헌금하면 복 받는다”는 거짓말
한국 교회에는 깊이 뿌리내린 한 가지 거짓말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 다음 구절이 이 거래 구조의 증거 텍스트로 자주 인용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말라기 3:10
그러나 이 구절을 구약 이스라엘의 언약 맥락에서 떼어내어 신약 성도의 투자-회수 공식으로 읽는 것은 심각한 문맥 오독이다. 말라기 전체는 이스라엘의 언약 신실성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며,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표시이지 물질적 투자 수익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이 논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성경은 이미 폭로하고 있다.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을 보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 욥기 1:9-10
“까닭 없이 경외하리이까.” 이것이 번영신학의 본질이다. 복을 받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축복이 사라지면 신앙도 사라진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거래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거래 논리를 욥의 친구들을 통해 정면으로 심판하신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욥기 42:7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은 정확히 이것이었다. “네가 고통받는 것은 네 잘못 때문이다.” 뒤집으면, “의로우면 형통한다.”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이 욥의 친구들의 신학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 자신이 이 논리를 부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마태복음 8:20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하셨다. 바울도 이 진리 위에 선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빌립보서 4:12
자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자족의 근거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분함이다.
월요일의 전장 — 정직, 직원, 세금
크리스천 사업가의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월요일의 구체적 결정에서 시험받는다.
첫째, 정직의 문제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 잠언 11:1
“너희는 재판에든지 길이든지 무게든지 양이든지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 레위기 19:35-36
레위기의 이 명령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로 끝나는 것을 주목하라. 정직한 거래는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은혜를 입은 자는 속이지 않는다.
한국의 사업 현실에서 정직은 종종 불리해 보인다. 거래처 접대, 리베이트, 세금 문제에서 “다들 그렇게 한다”는 압력은 거세다. 그러나 정직이 불리해 보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의 문제다. 모든 사업적 결정은 하나님 앞에서 내려진다.
세금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로마서 13:7
탈세는 단순한 법률 위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대한 불복종이다.
둘째, 직원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야고보서 5: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거류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니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니라.” — 신명기 24:14-15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에베소서 6:9
한국 사회의 갑을 관계, 야근 강요, 감정 노동 착취 속에서 이 말씀들은 결코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크리스천 사업가가 직원의 정당한 대가를 미루거나, 위계를 이용하여 인격을 짓밟는다면, 그의 주일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무게를 잃는다. 품꾼의 삯은 소리 지르며 하나님의 귀에 들어간다.
사업이 실패할 때 —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에 있는가
한국 교회에는 사업 실패자를 대하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높이다가, 실패하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시선을 보낸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의 논리와 정확히 같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논리를 “옳지 못하다”고 심판하셨다.
성경은 사업 실패를 다르게 본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욥기 1:2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38-39
사업 실패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파산도, 부도도, 신용불량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이 복음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 시편 37:23-24
교회는 실패한 사업가를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 붙드는 곳이어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갈라디아서 6:2
사업은 신앙의 긴장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업을 하면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의 전제가 틀렸다. 사업과 신앙은 긴장 관계에 있는 두 세계가 아니다. 사업은 신앙이 표현되는 현장이다. 주일에 고백한 하나님의 주권이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서 시험받고, 입술로 부른 찬양이 거래 현장에서 증명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말을 보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 에베소서 4:28
노동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축적이 아니라 나눔이다. 그리고 그 나눔의 동력은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된 은혜에서 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8:9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린도후서 9:7
크리스천 사업가의 정체성은 사업의 성공이나 실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공할 때에는 청지기로서 감사하고, 실패할 때에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녀로서 일어선다. 정직이 불리해 보일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인을 신뢰하고, 이윤을 얻었을 때에는 그것이 위탁받은 것임을 기억한다.
월요일 아침 차 안에서 당신이 붙잡아야 할 것은 사업 전략이 아니라 이 한 가지 사실이다. 당신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다. 그리고 그 주인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