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된 책이 지금도 유효한가 — 진보의 신화가 숨긴 진실

수천 년 된 책이 지금도 유효한가 — 진보의 신화가 숨긴 진실

#변증#성경론#영감론#진보의신화

당신이 품고 있는 전제

“성경? 수천 년 전 유목민이 쓴 책 아닌가요?”

이 질문은 순수한 호기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하나의 판단이 숨어 있다. 오래된 것은 열등하다는 판단이다. 최신 스마트폰이 10년 전 모델보다 낫듯이, 인류의 지식과 도덕도 시간이 갈수록 향상된다 — 이것이 우리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신앙이다.

C. S. 루이스는 이것을 “시대적 오만”(Chronological Snobbery)이라고 불렀다. 현재를 절대 기준으로 삼아, 과거의 모든 것을 미개하거나 원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

진보는 정말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었는가

다윈 이후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인류는 끊임없이 상승한다”는 낙관주의를 낳았다. 지식이 늘면 덕도 자연히 따라온다는 믿음이었다. 성경은 이 도식 안에서 “진화 이전 단계의 유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20세기가 그 낙관주의를 산산조각 냈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 문명의 심장부에서 벌어졌다. 홀로코스트는 바흐와 괴테와 칸트를 낳은 나라에서 자행되었다. 가장 “문명화된” 국가가 가장 체계적인 학살을 실행했다.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인간의 잔혹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이 잔혹함의 규모를 키웠을 뿐이다.

성경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예레미야 17:9

인간의 근본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부패다. 진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how)“의 영역이지, “왜(why)“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가 고대보다 우월하다”는 판단 자체가 이미 시대를 초월하는 기준을 전제한다 — 무엇이 “우월한” 것인지를 판단하려면 시간 밖의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자기모순을 직시할 때, “오래된 것은 열등하다”는 전제는 스스로 무너진다.

낡은 그릇 안의 영원한 내용물

그렇다면 성경이 고대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기록된 것은 사실 아닌가? 맞다. 그러나 이것은 약점이 아니라 설계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것을 유기적 영감론이라 불렀다. 성령은 각 저자의 인격, 교육, 시대적 경험, 문체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기계적으로 받아쓰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존재를 통해 말씀하셨다. 바빙크는 여기에 강력한 유비를 붙인다 — 성육신의 유비(analogia incarnationis). 하나님의 아들이 참 인간의 몸을 취하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참 인간의 언어와 역사적 조건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남성으로 오셨다고 해서 그분이 “그 시대에만 유효한 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이 고대 근동의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고대에 갇히지 않는다. 형식은 시대의 옷을 입지만, 내용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발원한다.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베드로후서 1:20-21

시대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성경이 수천 년이 지나도 유효한 결정적 이유는, 성경이 다루는 문제가 역사적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온다. 최첨단 의료 기술로 수명을 늘려도,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죄는 여전히 작동한다. 도덕 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우리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의미의 공허함은 여전히 찾아온다. 물질적 풍요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로마서 7:19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도서 1:2

3,000년 전 전도자의 탄식이 오늘 서울의 직장인에게도 정확히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조건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 죽음, 의미 — 이 세 가지 문제 앞에서 21세기 인간은 1세기 인간보다 한 치도 앞서 있지 않다.

성경은 바로 이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유일한 책이다. 죄의 진단, 죽음 너머의 소망, 하나님 안에서의 의미 — 이것이 성경의 주제다. 그리고 이 주제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결코 “구식”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성경의 유효성은 단지 “다루는 주제가 보편적이니까”라는 이유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대화편도, 노자의 도덕경도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성경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 책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칼뱅은 이것을 자기 인증(autopistia)이라 불렀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를 스스로 보여준다. 마치 백색과 흑색이 스스로 자기 빛깔을 증거하듯이.

그리고 이 자기 인증을 마음속에서 확증하시는 분이 계신다 —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아무리 위대해도, 셰익스피어가 독자 옆에 앉아 그 의미를 열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신 성령은 오늘도 독자의 마음을 열어 말씀의 깊이를 보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히브리서 4:12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이 표현에 주목하라. 성경은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작용하는 힘이다.

2,000년의 증거

이론만이 아니다. 2,000년의 역사가 이것을 증거한다.

1세기 로마의 노예가 이 책을 읽고 자유를 얻었다. 16세기 독일의 수도사가 로마서를 읽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19세기 런던의 공장 노동자와 창녀와 귀족이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변화를 경험했다. 찰스 스펄전은 30년간 매주 수천 명에게 설교하며 이것을 목격했다 — 글을 읽지 못하는 여인이 요한복음 3:16 한 구절에 무릎을 꿇었고, 무신론자 인쇄업자가 이사야 53장을 반박하려다 회심했다.

볼테르는 “100년 안에 성경은 골동품이 될 것”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집은 후에 성경 배포 창고로 사용되었다. 성경을 묻으려 한 자들은 사라졌지만, 성경은 여전히 서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 이사야 40:8

이 책이 모든 문화권, 모든 언어, 모든 계층에서 동일한 변화를 일으키는 이유는 단 하나다 — 이 책의 배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 이사야 55:11

사자를 풀어놓으라

성경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약점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공격을 받고도 서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이 책의 초자연적 성격을 가리킨다.

성경을 변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문을 열어 사자를 풀어놓으면 된다. 사자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한다.

진짜 질문은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한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 당신은 이 책을 실제로 읽어 보았는가?

로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라.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이 책이 당신의 가장 깊은 곳을 얼마나 정확하게 진단하는지 확인하라. 수천 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오늘 당신의 마음을 꿰뚫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단순한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시편 119:105

모든 시대에, 모든 곳에서, 이 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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