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장을 펼치면, 종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 규정이 나온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 레위기 18장은 동성 간의 성관계를 금한다. 이 구절들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 결론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성경은 고대 근동의 가부장적 편견을 반영한 낡은 책이라는 것이다.
이 판단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다. 그래서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 정말 그런가?
모든 구절이 같은 무게를 가지는가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도, 성경을 믿는 사람도,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성경의 모든 문장을 같은 층위에서 읽는 것이다. 제사장의 옷감 규정과 “살인하지 말라”를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면, 성경은 즉시 모순 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오래전부터 구약 율법을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장이 정리한 이 구분은 이렇다: 도덕법(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영구적 윤리 원리), 의식법(제사·정결 규정 —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어 폐기), 시민법(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사법 규정 — 그 안에 담긴 일반적 형평의 원리만 존속). 이 삼중 구분을 모르면 성경 윤리는 읽히지 않는다. 이것을 알면, 세 가지 난제가 다른 풍경을 드러낸다.
노예제 — 성경이 허용한 것인가, 제한한 것인가
구약에 종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규정의 방향을 읽어야 한다.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조항이 출애굽기에 들어 있다.
“사람이 그 남종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 놓아줄 것이며 그 남종이나 여종의 이 하나를 쳐서 빠지게 하면 그 이 대신 놓아줄 것이니라” — 출애굽기 21:26–27
주인이 종의 이 하나를 빠뜨려도 자유를 얻는다. 이것은 노예제를 축복한 것이 아니라, 당시 보편적이던 관행에 전례 없는 제동을 건 것이다. 시민법은 이상적 세계의 설계도가 아니다. 타락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허용하신 잠정적 규제다.
그리고 이 씨앗은 신약에서 폭발한다. 바울은 도망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이렇게 썼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하지 말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 — 빌레몬서 1:16
복음은 제도를 칙령으로 뒤엎지 않았다. 대신 내부에서 해체했다. 주인과 종이 같은 떡을 떼고 같은 잔을 마시는 공동체가 생겨난 순간, 노예제는 논리적 기반을 잃었다. 18세기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이끈 윌버포스, 노예선 선장에서 회심한 존 뉴턴 — 그 운동의 동력은 바로 이 복음이었다. 성경이 노예제를 낳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노예제를 죽인 것이다.
여성 — 바울은 정말 여성을 침묵시켰는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이 한 구절이 바울을 여성 혐오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편지의 네 장 앞에서, 바울은 여성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상황을 당연한 전제로 이야기한다. 여성의 공적 참여 자체를 금지하는 사람이 여성의 기도와 예언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잠잠하라”는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무질서에 대한 목회적 지시였지, 보편적 침묵 명령이 아니었다.
더 넓은 시야로 보면, 복음이 여성의 존엄에 무엇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부활의 첫 증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1세기 유대 법정에서 여성의 증언은 효력이 없었다. 만약 복음서 저자들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면, 남성 증인을 내세우는 것이 훨씬 전략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여성을 첫 증인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이것은 기원후 1세기의 문장이다. 이 선언을 시대착오적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시대를 수천 년 앞선 선언이었다.
동성애 — 의식법인가, 창조 질서인가
가장 첨예한 질문이 남았다. “동성애를 금지하는 레위기 구절은 새우를 먹지 말라는 규정과 같은 층위 아닌가?” 이 질문은 앞서 설명한 율법의 삼중 구분이 정확히 답하는 지점이다. 새우 금지는 의식법(정결법)이며 그리스도의 성취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성적 윤리는 레위기 18장 전체의 맥락에서 도덕법에 속하며, 신약에서도 반복 확인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윤리의 근거가 모세 율법이 아니라 창조 질서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24
이것은 이스라엘 이전의 언어다. 모세 이전, 율법 이전, 한 민족의 법전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설계에 관한 선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방 세계의 윤리적 혼란을 진단할 때에도, 근거는 유대 율법이 아니라 이 창조 질서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 로마서 1:26–27
“순리”와 “역리”. 바울의 판단 기준은 유대 관습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 곧 창조의 설계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 동성에 대한 이끌림을 경험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 경험 자체가 그 사람을 다른 종류의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뒤틀린 욕망을 품고 살며, 그 구체적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당신은 괴물이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욕망은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죄의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을 비판하는 잣대는 어디서 왔는가
마지막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의 윤리가 시대착오적이다”라는 비판은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가? 노예제가 나쁘다는 확신, 여성이 동등한 존엄을 가진다는 믿음, 약자를 착취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직관 — 이것들은 어디서 왔는가?
역사를 추적하면 답이 나온다. 인간의 보편적 존엄이라는 관념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인간관에서 자라난 열매다. 성경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잣대가, 사실은 성경이 세계에 선물한 잣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히브리서 13:8
성경의 윤리는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 시대가 성경의 윤리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낡은 것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감각을 영원한 기준으로 착각하는 우리 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