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도 이단에 빠지는데,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셨나

목사도 이단에 빠지는데,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셨나

#변증#예정론#성도의 견인#이단#교회론

30년 목회자가 이단 집단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장로가, 신학교 교수가, 선교사가 —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던 사람이 어느 날 비밀스러운 성경 해석을 내세우는 종파에 빠져든다. 그 소식을 접한 성도의 마음에는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밀려온다.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셨나?”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그렇다면 나도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교회에는 두 겹이 있다.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다 —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의 모임.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 — 참으로 선택받은 자들의 무리다. 칼뱅은 이 구분을 교회론의 기초로 놓았다(기독교 강요 4권 1장 7절). 목사 안수, 30년 교회 출석, 눈물의 기도 — 이 모든 것이 보이는 교회의 성원임을 증명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꿰뚫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로마서 9:6b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언약 공동체에 속해 있었지만, 그 안에서 참된 선택을 받은 자는 따로 있었다. 오늘의 교회도 다르지 않다. 외적 언약의 성원이 곧 내적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참된 믿음과 일시적 믿음

그렇다면 수십 년간 교회에서 헌신한 사람의 믿음은 가짜였단 말인가?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은 믿음의 종류를 구분한다. 바빙크는 네 가지를 제시한다(개혁교의학 4권). 역사적 믿음은 교리를 지적으로 수긍하는 것이다 —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했다(약 2:19). 일시적 믿음은 감정적 열정을 동반하나 뿌리가 없어 시험이 오면 말라버린다 — 돌밭의 씨와 같다. 기적적 믿음은 초자연적 체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 — 복음의 진리를 알고(지식), 그것이 참됨에 동의하며(동의),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맡기는 인격적 신뢰(신뢰)다.

오랜 교회 생활은 역사적 믿음과 일시적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교리를 정확히 알고, 예배에서 감동을 받고,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 신뢰, 곧 신뢰(fiducia)가 결여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더 정교하고 비밀스러운 해석을 제공하는 이단 집단에 극도로 취약하다.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감정적 경험이 결핍을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가능성을 이미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21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 것인가

여기서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왜 이 사람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인가?

개혁주의 신학은 선택과 유기의 비대칭성을 가르친다. 선택은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에서 나오지만, 유기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지옥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이 아니다. 도르트 신경 1조 15항이 분명히 한다 —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이요, 유기 가운데 있는 자의 멸망의 원인은 그 자신의 죄다. “하나님이 그를 이단으로 보내셨다”가 아니라, “그는 선택의 은혜 밖에 있었으며, 자신의 영적 나태와 교만으로 그 길을 걸어갔다”가 더 정확한 진술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이 인과의 방향을 분명히 밝힌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데살로니가후서 2:10-12

하나님이 미혹을 “보내셨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순서를 보라 — 그들이 먼저 진리의 사랑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도 인간의 책임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 참된 성도는 끝까지 보존된다

여기서 성도의 견인 교리가 빛을 발한다. 이 교리는 “신자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참된 성도도 넘어지고, 심각한 죄에 빠지고, 일시적으로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왜? 우리의 붙잡는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8

로마서 8:30의 “황금 사슬” —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 이 사슬의 어느 고리도 끊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의 신실함에 대한 보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보증이다(엡 1:13-14).

그렇다면 이단에 빠진 목사는? 요한은 간결하게 답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요한일서 2:19

그들의 이탈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미 있던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남은 자에게 — 정죄가 아니라 점검

이 진리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첫째, 정죄가 아니라 겸손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유기된 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만 가지신 판단권을 침탈하는 교만이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바울은 선택의 교리를 가르친 직후 곧바로 이렇게 고백한다 —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롬 10:1). 예정 교리를 참으로 이해한 사람은 더 뜨겁게 기도한다.

둘째, 자기 점검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 고린도후서 13:5a

“나는 30년을 교회에 다녔으니 괜찮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내 믿음에 지식만 있고 신뢰가 없지는 않은가? 교리를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대체하고 있지는 않은가?

셋째, 선택의 교리를 공포가 아니라 소망으로 붙잡는 것이다. 이 교리는 “나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소망의 교리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붙잡고 계신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단에 빠진 이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라. 구원의 확신은 교회 경력에서 오지 않는다 — 오직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일으키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있는 신뢰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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