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없는 시대를 스스로 기록한 책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으로 끝난다. 그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약 400년의 간격이 놓여 있다. 신약을 펼치면 갑자기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성전에는 헤롯이 세운 거대한 증축물이 서 있으며, 유대 땅에는 바리새파·사두개파·에세네파가 분화되어 있다. 이 모든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공백을 가장 풍부하게 메워주는 문서가 있다. 마카베오기 상·하권이다.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유다 마카비(마카베오)의 반란, 예루살렘 성전 수복과 하누카의 재봉헌(기원전 165년), 하스몬 왕조의 흥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교차 검증되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이 책 자신이 매우 중요한 자기 고백을 한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보이지 않은 지 오래이므로, 그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 마카베오상 9:27 (사역)
마카베오기의 저자는 자신이 선지자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기록한다. 자기 글을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라는 공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 안에 마카베오기가 왜 정경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정경성은 그 책이 참된 역사를 기록했는지가 아니라, 그 기록이 성령의 감동(inspiratio) 아래 선지자적 직분을 통해 주어졌는지에 달려 있다.
참된 역사와 영감된 말씀은 같지 않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정경이 아니라는 판단은 거짓 문서라는 뜻이 아니다. 마카베오기는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되찾은 사건을 사실대로 기록한다. 그 시대 유대교의 신앙과 고통, 저항의 결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역사 자료로서 이 책은 탁월하다.
그러나 참된 역사와 영감된 말씀은 다른 범주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도 참된 역사지만 정경이 아니고, 교회사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참이지만 성경이 아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 1권 7장에서 강조한 대로, 성경의 권위는 그 안의 내용이 유익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와 기록 행위 자체의 신적 영감에서 온다.
가톨릭 전통이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정경으로 선포한 것은, 이 구분을 흐린 결정이었다. 마카베오하 12장 43~45절(전사자를 위한 속죄 제사)은 연옥 교리의 근거로 사용되었지만, 이 본문은 히브리서의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히브리서 9:27
종교개혁이 외경을 정경에서 “뺀” 것이 아니다. 트렌트가 히브리 정경의 경계를 새로 넓힌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2항은 이 구분을 선명하게 지킨다. “외경이라 불리는 책들은 신적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성경 정경의 어느 부분도 아니며, 따라서 교회 안에서 어떤 권위도 없다.”
침묵의 400년 — 멈춤이 아니라 응축
그렇다면 400년 동안 하나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가?
여기서 말씀의 중단과 섭리의 중단을 구분해야 한다. 새로운 특별계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셨다. 선지자의 목소리가 끊긴 그 400년 동안, 하나님은 복음이 들어설 토양을 만들고 계셨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층위에서 그 준비를 볼 수 있다.
첫째, 헬라어라는 언어의 강바닥.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지중해 세계에 하나의 공용어 — 코이네 헬라어 — 를 만들었다. 이 기반 위에서 기원전 3세기에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된다. 칠십인역(Septuagint). 이 번역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열방으로 흐를 수 있는 언어의 강바닥이 되었다.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인용할 때 주로 이 칠십인역을 사용했다.
둘째, 묵시문학이라는 소망의 어휘.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 속에서 유대 묵시문학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 “인자”, “부활”, “마지막 날” 같은 어휘가 이 시기에 다듬어졌다. 예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셨을 때, 그 언어는 청중에게 낯설지 않았다. 400년의 기다림이 그 어휘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셋째, 회당이라는 복음 전파의 통로.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토라를 읽고 기도하는 장소로 회당을 발전시켰다. 바울의 선교 여행을 보라.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사도행전 17:1-2
바울은 새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회당을 먼저 찾았다. 그곳에는 이미 구약을 아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이 복음의 첫 청중이었다.
바빙크가 『개혁교의학』 1권에서 말한 대로, 계시는 유기체다. 씨앗이 심기면 즉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땅 속에서 뿌리가 뻗고 분화가 일어난다. 400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때가 차매”(갈 4:4,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직전의 응축이었다.
하스몬 왕조의 역설 — 사람이 구원할 수 없다는 증명
마카베오기의 가장 날카로운 교훈은 묘하게도 그 이야기의 결말에 있다.
처음에 마카베오 가문은 율법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유다 마카비는 성전을 되찾고 제단을 다시 봉헌했다. 거룩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이 왕좌와 대제사장직을 함께 움켜쥐면서 이야기는 급격히 비틀어진다. 하스몬 왕조는 권력 투쟁으로 분열되었고, 대제사장직은 정치적 거래의 도구가 되었으며, 결국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 군단 앞에 예루살렘의 문을 열었다.
성전은 여전히 서 있었다. 제사장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장사꾼의 거래소가 되었고, 그 제사장들 중에는 예수를 죽음에 넘긴 자들이 앉아 있었다. 율법을 위해 순교한 자들의 후손이, 율법의 주인을 처형한 자들이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스몬 왕조의 몰락은 침묵의 400년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드러낸다. 칼도, 왕권도, 제사장직도, 심지어 거룩한 열정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 지도자는 그가 얼마나 경건하게 시작했든, 결국 실패한다. 이스라엘에는 참된 왕이자 참된 대제사장 — 타락하지 않는 한 분 — 이 필요했다.
400년의 침묵이 끝나고 광야에서 들린 첫 목소리가 “회개하라”였던 것은 그래서다. 요한은 단순한 종교 개혁가가 아니었다. 약속된 분의 오심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 요한복음 1:23
400년 끝에, 말씀이 다시 임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책으로 오지 않고, 육신으로 오셨다(요 1:14).
말씀의 충분함이라는 고백
한국 교회의 오늘에도 침묵의 400년은 한 가지 경고를 보낸다. 말씀이 충분히 선포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공백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에녹서와 바룩서로 채웠고, 613개의 율법 울타리로 채웠다. 오늘 우리는 특별 체험으로, 숨겨진 진리를 약속하는 소그룹으로, 유대 절기를 기독교 절기로 도입하자는 운동으로 채우려 한다. 어떤 것은 진지한 경건의 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권위로 다루는 순간, 혼란이 시작된다.
아모스가 미리 경고한 기갈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아모스 8:11
외경이 정경 밖에 있다는 고백은 단순히 책 목록을 정리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된 계시를 주셨다는 고백이며, 그 계시가 충분하다는 믿음의 선언이다. 400년의 침묵 끝에 오신 그분 안에서 모든 말씀이 “예”와 “아멘”이 되었다(고후 1:20). 더 보태야 할 계시는 없다.
마카베오기는 귀중한 렌즈다. 그러나 빛은 아니다. 렌즈로 성경을 더 선명하게 볼 수는 있어도, 렌즈 자체가 빛이 될 수는 없다. 빛은 오직 한 분에게서 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