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책에서 발견한 익숙한 그림자
성경 66권 밖에 놓인 책을 펼쳤을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톨릭 성경에는 포함되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없는 지혜서(Wisdom of Solomon)라는 책이 있다. 기원전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기록된 이 책의 2장 12~20절을 읽으면,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름이 돋는다.
“의로운 자를 가두자, 그가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이니. 그는 우리의 행위를 비난하고, 율법을 어긴다 하여 우리를 고발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주장하며, 스스로를 주의 아들이라 부른다. (…) 그의 말이 참인지 살펴보자. 그의 마지막이 어떠할지 지켜보자. 만일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며 대적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모욕과 고문으로 그를 시험하여, 그의 온유함을 알아보고 인내를 시험하자.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그를 정죄하자.”
— 지혜서 2:12-20 (사역)
이 구절을 이사야 53장 옆에 놓으면, 유사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이사야 53:3, 5, 7
의로운 자의 고난, 적대자들의 조롱, 수치스러운 죽음. 두 본문은 같은 장면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혜서도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 아닌가? 외경에도 선지자적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성경의 권위를 어디에 세우느냐라는 근본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메아리는 원래 목소리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 지혜서 2장과 이사야 53장의 유사성은 실재하지만, 그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예언적 계시(revelatio prophetica)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 성찰(meditatio humana)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이미 이사야를 읽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지식인이 히브리 성경에 정통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혜서 2장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의로운 자가 악인에게 핍박받는 보편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추한 인간의 묵상이지,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그림자가 실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정적 차이는 신학적 벡터(방향)에 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대속적 죽음을 죽는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종의 고난에는 다른 이들의 죄를 담당하는 언약적 구조가 있다. 반면 지혜서 2장의 의로운 자는 도덕적 순교자다. 그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속죄의 구조가 없다. 이사야는 십자가를 가리키고, 지혜서는 순교를 묘사한다. 닮은 장면이지만, 가리키는 곳이 다르다.
”좋은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이 남는다. 지혜서에 진리가 담겨 있다면, 왜 정경이 아닌가?
여기서 “진리를 담았다”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됐다”는 같지 않다는 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는 “하나님이 내쉬신”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권위는 내용의 유익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록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서 온다. 경건한 인간의 묵상에도 진리의 편린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성령의 영감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를 일반은혜(gratia communis)로 설명한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2권 2장 15절에서 “이방인들의 저작에도 진리의 빛이 빛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일반은혜의 흔적이 특별계시와 동등한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 지혜서는 진리의 원천(Fons Veritatis)이 아니라 진리의 메아리(Echo Veritatis)다.
정경의 문은 누가 열었는가
“개신교가 성경에서 책을 뺐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역사적 사실은 정반대다.
가톨릭이 외경 7권을 공식 정경으로 선포한 것은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반발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그 이전에는 교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4세기의 히에로니무스(제롬)는 불가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면서도 히브리 정경과 외경을 명확히 구분했다. 개신교가 뺀 것이 아니라, 트렌트가 새로 추가한 것이다.
정경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세 층위를 제시한다.
- 내재적 기준 — 성경 스스로의 신적 자기증언(autopistia). 성경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 역사적 기준 — 사도적 또는 선지자적 기원. 외경 저자들은 선지자적 직분을 주장한 적이 없다. 마카베오상 자체가 “선지자가 없는 시대”를 인정한다(마카베오상 4:46, 9:27).
- 교회적 기준 — 보편 교회의 수용. 그러나 교회는 정경의 어머니가 아니라 정경의 딸이다(ecclesia non est mater, sed filia Scripturae). 교회가 정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정경이 교회를 세운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범위를 규정하셨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 누가복음 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 이것은 히브리 정경의 세 부분(토라, 네비임, 케투빔)을 가리킨다. 신약은 구약 히브리 정경을 560회 이상 인용하지만, 외경을 “성경에 기록되었으되”라는 공식으로 인용한 사례는 없다.
지혜서 안의 낯선 목소리
외경이 정경이 아니라는 판단은 외부 기준만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다. 지혜서 내부에서도 성령 영감의 부재를 보여주는 흔적이 있다.
지혜서 8:19-20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한 영혼을 받았고, 아니 오히려, 선한 자였기에 순결한 몸에 들어갔다.” 이것은 플라톤의 영혼 선재설 — 영혼이 육체 이전에 존재하며 육체에 “들어간다”는 사상 — 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러나 이 사상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히브리 창조론(창 2:7)과 양립할 수 없다.
성령의 영감 아래 기록된 글이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관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철학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이 내적 증거는 지혜서의 저자가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 자체로 정경적 권위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외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외경을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권위의 층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 성경 — 신앙과 삶의 최종 권위
- 신앙고백서 — 성경 해석의 공동체적 합의
- 경건한 저작 — 외경, 교부 문헌, 개혁주의 고전
- 일반 기독교 서적 — 유익하나 권위 없음
지혜서는 세 번째 층위에 놓인다. 경건하고 유익한 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이 구분은 외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모든 독서에 적용되는 원리다. 칼뱅의 기독교강요도, 바빙크의 개혁교의학도,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신학 서적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
진리를 담은 글은 많다. 그러나 진리의 원천은 오직 하나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베드로후서 1:21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만일 외경이 정경이 아니라면, 구약과 신약 사이 400년의 침묵 동안 하나님은 정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그 침묵의 시대에 쓰인 마카베오기는 왜 그토록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가? 정경이 아닌 책이 정경의 배경을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그 책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다음 편에서 그 침묵의 시대로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