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은 자의 얼굴
우리는 흔히 “인격”이라는 단어를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 말을 하고 생각을 나누는 사람에게 붙인다. 그렇다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존재, 첫 울음을 터뜨리기 전의 존재는 인격이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현대 사회는 “발달 단계”로 답하려 한다. 심장이 뛸 때, 뇌파가 감지될 때, 통증을 느낄 때 — 어떤 기능이 시작되는 지점을 인격의 출발선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말한다. 인격의 근거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라고.
이 글은 태아의 인격성에 관한 성경적 논증을 따라가면서, 교회가 생명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함께 묻는다.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개혁주의 신학은 형상을 크게 두 차원으로 구분한다. 좁은 의미의 형상은 지식, 의, 거룩함 — 타락 이후 훼손된 도덕적 탁월함이다. 넓은 의미의 형상은 이성적, 도덕적, 관계적 구조 — 타락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존재론적 토대(ontological constitution)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한가? 만약 형상이 특정 기능의 발현이라면, 그 기능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태아는 형상의 담지자가 아닐 수 있다. 뇌사 환자도, 중증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형상이 존재의 구조 자체라면, 그 구조를 부여받은 순간부터 인격이다. 성경은 후자를 가리킨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눈을 피하지 못하였으며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시편 139:13-16
다윗은 여기서 모태 안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나”라는 인칭 대명사를 일관되게 사용한다. “나의 모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나의 형체”. 아직 형체가 완성되기 전인 그 존재를 다윗은 “나”라고 부르고, 하나님은 “너”로 보신다. 형성 중인 생물학적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인격으로서의 “나”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은 더욱 놀랍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 예레미야 1:5
하나님의 앎(ידע, yada)은 단순한 정보의 인지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의 설정이다. 생물학적 존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그를 인격적으로 아셨고, 부르셨다. 인격의 인식이 생물학적 존재보다 앞선다.
원죄가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
인격성의 또 다른 증거가 의외의 장소에서 나온다 — 바로 원죄 교리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로마서 5:12
아담 안에서의 연대적 정죄(federal headship)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태어난 아기뿐 아니라 모태 안의 태아에게도. 다윗은 이것을 직접 고백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시편 51:5
잉태 순간부터 죄 안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역설이 등장한다. 죄책이 귀속되려면 인격이 전제되어야 한다. 돌이나 세포 덩어리에 죄가 전가될 수는 없다. 죄책 없이 구속이 필요 없고, 인격 없이 죄책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정죄받는 그 존재 — 잉태된 순간의 태아 — 는 이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격이다.
로마서 9장은 이 논점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로마서 9:11
에서와 야곱은 모태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선택과 원죄의 전가 — 이 두 가지 모두 태아가 하나님 앞에 선 도덕적 인격체임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아로 존재하셨다
성육신은 태아의 존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학적 논증을 제공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누가복음 1:31
성자 하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아의 형태로 존재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인성을 취하신 그 순간, 그분은 출생 이전의 존재 — 태아 — 로 계셨다. 만약 태아가 아직 완전한 인격이 아니라면, 성육신의 신비는 어느 시점에서 비로소 “참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되고, 이는 성육신 교리 자체를 훼손한다.
더 놀라운 장면이 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태중의 세례 요한이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누가복음 1:4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요한이 성령 안에서 반응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반사가 아니라 영적 인격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아로 존재하기에 합당하셨다면, 태아는 존엄한 인격이다.
율법이 태아를 어떻게 보호했는가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이 청구하는 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이 정한 대로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 출애굽기 21:22-25
이 본문의 해석에서 핵심은 히브리어 “아손”(אָסוֹן, 다른 해)이 누구에게 적용되는가이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으면, “다른 해가 있으면”이라는 조건은 산모와 태아 모두를 포괄한다. 태아에게 치명적 해가 발생했을 때 동태복수법(lex talionis) — “생명은 생명으로” — 이 적용된다는 것은, 모세 율법이 태아의 생명을 성인의 생명과 동등하게 취급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9장의 노아 언약은 이 원칙의 보편적 토대를 제공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창세기 9:6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금지되는 이유는 단 하나 — 그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노아를 통해 전 인류에게 주어졌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제135문답은 제6계명이 요구하는 바를 이렇게 해설한다: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보존하려는 모든 주의 깊은 노력”이 이 계명의 적극적 의무라고. 태아는 가장 취약한 이웃이며, 바로 그 취약함 때문에 가장 강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내 몸, 내 선택”이라는 언어의 함정
현대 사회에서 낙태를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수사는 “자기결정권”이다. 내 몸에 대한 권리, 내 삶에 대한 선택. 이 언어는 자유와 자율이라는 가치를 호소하기에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두 가지 근본적 문제가 있다.
첫째, 태아는 어머니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수정 순간부터 태아는 고유한 DNA를 가진 구별된 존재다. 어머니와 다른 혈액형을 가질 수 있고, 독립적인 발달 과정을 거친다. “내 몸”이라는 전제 자체가 생물학적으로 부정확하다.
둘째, 더 근본적으로, 성경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 선언은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의 토대 자체를 해체한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 사무엘상 2:6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은 동등한 두 권리의 충돌이 아니다. 하나는 존재의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의 자유다. 선택의 자유가 존재의 권리를 삼킬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의 자유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교회의 이중 사명 — 진리와 은혜를 함께
여기까지의 논증이 명확하다면, 교회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죄의 확성기를 들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 시편 82:3
태아는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은 정죄가 아니라 돌봄이어야 한다.
교회의 첫 번째 무기는 정치가 아니라 복음이다. 법을 바꾸더라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이 생명의 존엄에 대한 참된 인식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동시에 원치 않는 임신 앞에 선 여성에게 실질적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 위기 임신 상담, 미혼모 가정 지원, 입양 문화 회복. 생명을 지키라고 외치면서 생명을 지키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 외침은 절반만 진실이다.
정죄가 아닌, 은혜의 선언
마지막으로, 이미 낙태를 경험한 이에게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의사는 환자를 정죄하지 않는다. 진단하고 치료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죄를 죄라 부르되, 동시에 그 죄를 덮는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1
“결코”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피가 덮지 못하는 죄는 없다. 낙태의 죄도 예외가 아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 계시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로 맞이하신다.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는 입과 은혜를 전하는 손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생명의 거룩함을 타협 없이 가르치되, 그 진리 앞에 무너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 —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생명 앞에서 감당해야 할 이중 사명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 시편 127:3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기업이다. 태어난 생명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도. 교회는 이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되, 그 증거의 방식이 곧 복음이 되게 해야 한다. 말로만 생명을 외치지 말고, 손으로 생명을 품으라.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은혜의 손을 내밀라.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킨다는 말의 참된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