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불편한 질문 앞에서, 성경이 침묵하지 않는 이유
1.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질문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7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유목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기독교 선교사가 도착하기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부딪히는 물음이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나쁜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 괜찮을 것이다”라고 가볍게 안심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 지옥이다”라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양극단 어디에도 서 있지 않다.
이 글은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개혁주의 신학의 정통 전통이 이 질문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2. 아무도 몰랐다는 변명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 — 일반계시
성경은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20
바울은 이 구절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냉혹할 만큼 분명하다: 핑계할 수 없다(ἀναπολογήτους).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고, 모든 인간은 그 계시를 받았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칼뱅은 이것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기독교 강요」 1권에서 그는 인간 안에 ‘신성의 감각(sensus divinitatis)‘이 씨앗처럼 심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민족, 어떤 시대, 어떤 문화권에도 종교적 본능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로마서 1장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이 이 계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로마서 1:21-23
문제는 지식의 부재가 아니다. 지식의 억압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그 앎을 거부하고,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뿌리이고, 모든 종교적 왜곡의 출발점이다.
3. 양심이라는 두 번째 증인 — 로마서 2장
바울은 일반계시를 외적 증거(창조 세계)에서 내적 증거(양심)로 확장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로마서 2:14-15
모세의 율법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의식이 있다. 살인이 나쁘다는 것,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거짓말이 잘못이라는 것 — 이런 기본적 도덕 인식은 문화를 초월하여 인류 보편에 존재한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으신 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양심을 따라 사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바울의 답은 단호하다: 아니다. 로마서 3장에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의 결론 아래 놓는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로마서 3:10-12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정죄의 증인이다. 양심은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을 증명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 알고 있는 옳음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발한다.
4. 구원의 유일한 근거 — 그리스도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은 주저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이 선언은 종교다원주의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서 양보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4절도 이 원칙을 분명히 한다:
“복음의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며,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고백서의 바로 앞 조항(10장 3절)은 주목할 만한 예외를 언급한다: 유아기에 죽은 택함받은 아이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반드시 인간의 의식적 믿음의 행위를 전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5.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 우리가 모르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기
여기서 칼뱅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교리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예정)**이다.
“그런즉 이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리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6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질문에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데 있어 인간의 한계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선교사가 도달하지 못한 곳이라 해서 성령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아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역사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불러내실 수 있다. 구약의 멜기세덱, 욥, 니느웨 사람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둘째, 심판의 최종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아브라함이 소돔 멸망 앞에서 고백한 한마디가 여기서 울려 퍼진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 창세기 18:25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부당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감상적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지점에서 깊은 통찰을 더한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 — 선택이든 유기이든 — 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긍휼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공의에서 영광을 나타낸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기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결정적이되 포괄적이지는 않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
- 모든 인간은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
- 모든 인간은 그 계시를 억압하고 죄를 범했다
-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
-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정의롭다
성경이 상세히 밝히지 않은 것:
-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개인의 최종적 운명
개혁주의 전통은 이 침묵 앞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voluntas Dei arcana)을 다 꿰뚫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드러난 뜻(voluntas Dei revelata)은 분명하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일반계시는 그 자체로 구원에 충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책임을 부여한다. 특별계시 — 복음 — 만이 구원의 길을 밝히며,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 안에서 그 복음을 들을 자들을 정하셨다.
7. 이 질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 선교의 긴급성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신학적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성경은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려 보낸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이 논리를 정확히 전개한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0:14-15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교회의 미완성된 사명이다. 하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통로로 교회를 세우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이 사실을 부동의 명령으로 못 박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8:19-20
스펄전은 이 명령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예정론과 모순된다는 비판에 이렇게 응답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정론은 선교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의 확실한 열매를 보장한다.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우리가 전하면 반드시 응답하는 영혼이 있다.
로이드존스도 같은 확신으로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한 참된 답은 신학 강의실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발견된다. 만약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소식이라면, 그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교회에게 철저한 긴급성의 부름이다.
8. 질문의 방향을 바꾸다
우리가 정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질문을 던지는 많은 사람은 사실 아마존의 원주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 이 논증의 숨겨진 결론은 “그러므로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자기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마존 밀림에 있지 않다.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고,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접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정작 복음을 들은 당신 자신은 그 복음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는가?
“종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자는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 누가복음 12:47-48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이 받은 빛에 비례한다는 원리를 가르치신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보다 들었으면서도 거부한 사람의 책임이 더 무겁다.
맺으며: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운명에 대한 최종 답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하나님은 긍휼하시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고백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 은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줄 닻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를 편안하게 앉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질문은 다른 질문으로 변환된다:
복음을 들은 당신은 그 복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한 자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선교의 긴급성은 이론적 사변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이 닿지 않은 곳이 있고, 그곳에 사람이 있다. 교회가 보내심을 받은 것은 바로 그들을 위해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운명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무거운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을 선교로 부르시는 음성일 수 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로마서 10:15